발전을 위해선 진통과 정체는 필수
평소 단골로 자주 가는 술집이 있습니다. 그 술집 사장 형이 예사롭지 않은 이력을 갖고 계신데요. 문화재 복원 관련해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형과 제가 지난 주 일요일에 술을 먹으며 얘기를 하다가 공통적으로 의견이 겹친 부분이 있었습니다. 뭐냐구요?
대한민국은 뿌리부터 썩어 있다.
그 형이 경복궁 복원 당시 팀원으로 활동할 때의 일화입니다. 당시 박물관장이라고 하는 분이 복원을 전체적으로 진두지휘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문화재 복원을 한다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선사 시대 고인돌도 솔직히 얼핏 보면 큰 감흥이 오기 어렵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엄청납니다. 돌부리 하나도 쉽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관장님 왈,
"그냥 부숴."
(거쳐 들은 내용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화학적 처리를 하면서 원본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한 궁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물리적 변화로 아예 기존의 흔적을 형태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 거죠.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탈레반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고 보여졌습니다.
문화재에 대한 몰이해로 무장한 담당자들이 실무를 맡으니 보여주기식 작업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이들이 문화재 복원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문화재에 대한 보존을 생각하기 보다는 정해진 기한 내에 일을 끝내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봤습니다. 별다른 게 적폐입니까?
이게 적폐입니다.
최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대기업들에게 경고했죠? 자신들이 주력으로 미는 계열사가 아닌 비주류 계열사는 팔라고요. 대기업들마다 떠오르는 주력 계열사가 아닌 계열사들을 억지로 팔라고 하는 것은 시장 경제상으로 볼 땐 당연히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적폐 청산을 향한 진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성장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단기간에 달성했죠? 무리하게 성장 지향을 추구하다가 탈이 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성장이란 미명 하에 이를 그간 덮어 왔고, 이제 좀 더 선진국의 단계로 나아가려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전 이게 경제 분야의 적폐라 봤습니다.
이런 적폐들은 비단 경제, 문화 등 큼직한 부분에서만 숨쉬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적폐의 흔적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실력 위주의 사회가 아닌, 사내 정치나 보여주기식 결과로 쌓아 올린 모래성 같은 사회. 바람에 쉽게 사라질 탑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성과 위주에 길들여진 사회 풍토는 우리들을 경쟁의 소용돌이에 내몰았습니다.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패배자인 듯 낙인 찍고 있죠. 개개인들의 왜곡된 가치관은 국가, 기업, 관료들이 나라를 이끌었던 방식이 사람들에게 스며 든 결과물입니다.
왜 조지 소로스가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공무원만 되고 싶어하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보여지지 않아서일 겁니다.
제가 퇴사한 이유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존의 기업들이 구축해 놓은 시스템, 협력사를 압박해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구조 등도 적폐의 산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진단해 봤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제가 보여준 퍼포먼스가 대단히 뛰어났다면 좀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그들(기업을 비롯한 기존 기득권층)이 제 말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 위주의 풍토, 공무원만 지향하는 사회 등 여러 문제들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에 편승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기업에 몸담던 제가 이젠 시스템 바깥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려고 합니다. 쉽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쉽진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걸음이 분명 다른 이들에게 커다란 메시지를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리하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