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설렘을 담다
이 이야기는
빵을 좋아하는 그녀의 이야기다.
그녀와 내가 만난 건, 나의 일 때문이었다.
내 고객으로 그녀는 내게 찾아왔다.
그녀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수화기상으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나의 일방적인 외침에 그녀가 화답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냥 나는 그녀의 리액션을 경험하는 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녀와 대화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핑계거리가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 날의 기억을 묻어두고 나의 일상을 살았다.
다시 대화를 한 건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친구들과 집에서 술을 먹다가 불현듯 그녀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제가 다시 작업한 걸 봐 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그 순간만큼은 화가 났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일을 봐야 한다니!!
그러나 그 말을 건넨 사람이 그녀였다. 이건 좋은 핑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온갖 허세를 잔뜩 떨면서 그녀가 다시 작업한 걸 수정해 주었다(참고로 나는 글 에디터다). 그리고 나서 술도 마셨겠다, 이게 이렇게까지 해 줄 만한 게 xx님이니까 특별히 해 준 거다~! 너는 나한테 밥을 사야 한다~!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어라? 이 친구 봐라. 흔쾌히 내 제안을 승낙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빵을 좋아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나의 온 신경계가 서울 시내 주요 빵집에 대한 레이더망을 돌리기 시작했다. 마침 우리 동네엔 정말 맛있는 빵집이 있다. 우스블랑(이게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 거다, 우리 집의 입지 조건에 감사를 표했던 순간이다). 우스블랑 아냐고 물어보자마자 그녀는 따발총처럼 우스블랑의 빵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순간, 우스블랑을 떠올린 나의 머리, 칭찬해. 빵을 소재삼아 나와 그녀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우리는 그로부터 2주 후에 만나기로 했다.
2주가 지났다.
지금 와서 그 친구가 내게 말해 줬는데, 나 진짜로 오덕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 때도 전날까지 고객님들께서 주신 일을 처리했다. 연이은 철야작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편안한 호텔에 가서 일을 했다. 그래서 그 때, 난 참 폐인인 채로 그녀를 맞이했다.
사실 그녀의 리액션이 좋았던 건 확실하고, 그녀가 매력적이라 만나고 싶었기도 했지만, 엄청 그 만남을 기대하거나 그런 건 아녔다. 근데 만나고 나서 내가 진짜로 잘못 생각했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그녀는 너무 이뻤기 때문이다. 파마를 전날 하고 와서라고 하기엔 그냥 본바탕이 이뻤다(그냥 내 눈에 콩깍지였을 수도 있지만, 그 땐 그랬다).
그 때부터 내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뭘 먹어야 하지? 얼굴을 쳐다도 못 봤다. 무슨 메뉴를 먹어야 할까? 사실 그 날, 그녀가 밥을 사겠다고는 했지만, 난 얻어먹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게 하필이면 노루궁뎅이란 게 들어가 있는 샤브샤브.
샤브샤브를 입에 넣는둥 마는둥 했다(그녀가 나중에 말해 준 거지만, 정말 맛이 없다고 했다. 사실 난 그 때, 워낙 떨렸기에 그 맛이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그녀가 맛이 없었다고 하니 다시는 갈 생각은 없다). 도저히 대화를 진행시키는 게 맨정신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초면에 죄송한데, 술 좀 먹어도 될까요?
정말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꼈던 건,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순순히 응했다는 거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때의 소회에 대해서 말해 줬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내 당혹스러움이란 지금도 식은땀이 절로 나는 듯하다. 술을 한 병 꿀꺽꿀꺽 마셨는데도 그녀의 얼굴을 못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까지 사람 얼굴을 못 쳐다본다는 걸 그 날 처음 알았다. 난 그 날의 만남이 망한 줄 알았다.
감사하게도 그녀는 다시 만나 주었다. 원래 그 날 먹기로 했던 메뉴는 쭈꾸미였다. 그런데 내가 처음 만나는 날, 정말 죄송스럽게도 일만 하다가 추레한 상태로 만나러 갔었다. 그러다 보니 내 편의대로 장소도 바꿨다. 그래도 그녀가 사는 동네에서 바꾼 장소인 홍대가 더 가까웠기에 흔쾌히 장소 변경도 허락해 줬다. 그래서 내가 용기를 또 냈다(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한다고 하지 않던가?). 원래 먹으려고 했던 충무로의 쭈꾸미 집에 가자고 했다. 내가 엄청 재미도 없었을 거고, 술만 먹었는데도 그녀는 내 제안을 또 받아줬다. 보기에는 엄청 도도한데 내 얘기에는 귀를 잘 기울여 주었다.
뭔가 나의 로맨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스블랑에 대해서 조잘조잘 떠들던 그녀가 말했던 빵이 하나 있었다. 갈레트. 그 빵은 오전에 가야지 살 수 있는 인기 메뉴라고 했다. 나는 동네 사람이었지만, 그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만남을 앞둔 당일 오전에 우스블랑에 갔다. 아니나다를까 갈레트는 전부 팔렸다. 아니, 정확히는 1인용 갈레트는 전부 팔렸다. 4인 가족이 먹을 분량인 케이크 크기의 갈레트는 있었다. 질렀다. 사실 금액이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뭔가 그녀에게 내가 당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큰 갈레트를 충무로 역 보관함에 넣어두고 쭈꾸미집에 갔다. 그 다음 날은 그녀가 새롭게 옮긴 회사로 출근하기 전날이었다. 회사원의 고충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소위 말해 달렸다. 나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며 함께 술을 먹었다. 뭔가 로맨틱하고 싶었지만, 로맨틱하지 못했다(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이겠지?). 그렇게 술에 취한 와중에도 그녀의 손에 갈레트를 쥐어 주었다. 술을 먹으면 기억이 조금씩 끊기는 타입이다 보니 그녀의 반응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집에 갔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이로 지내면서 맛있는 빵집에도 간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횟집이나 오마카세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면서 그 시간과 그 맛을 공유하고, 이것이 추억의 조각을 이룬다는 건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건 백만분의 일에 달하는 행운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