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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늘을 똑똑하게 즐기자

챠랑할부 사태를 겪으며

by 하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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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 휴가 시즌입니다. 여름 휴가는 많은 직장인들이 기다리는 휴식의 시간입니다. 항상 똑같았던 시간에서 작은 쉼표를 둘 수 있다는 것에 이것만 기다리는 이들이 엄청 많죠. 저 역시도 휴가 기간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회사원 시절이 있습니다. 퇴사 이후 간혹 회사원 친구들이 묻습니다. "이번에 휴가 계획이 어떻게 되니?" 하지만 전 이제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휴가인데, 굳이 먼 곳을 찾아 떠나야 하니?" 최근 폭염이 일상이 되면서 휴가를 멀리 떠나지 않고 쇼핑몰로, 카페로 도시 내 시원한 장소로 피하는 '몰캉스 족'이 대세가 된 것을 보면 시원한 곳에서 이렇게 매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제 모습은 휴가 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제가 갑자기 일상이 휴가라는 얘기를 하며 평범한 하루를 언급했냐?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에게 의도치 않은 휴가가 주어지면 무엇을 할 거냐는 인터뷰를 이전에 본 적이 있는데 어떤 과/차장급으로 보이는 분께서 밀린 은행 업무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유달리 남았습니다. 우리는 아침 8~9시에 회사에 출근해서 1시간 내외의 잠깐의 점심 시간 이외에는 퇴근 전까지 자신이 주도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는 틈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게 어머니께서 30여년 째 계속 은행을 다니고 계시다 보니 제 은행 업무를 사실상 대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퇴사 과정에서 어머니와 갈등을 빚고 대화가 뜸해지면서 제 통장을 제 손으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자기 고백을 해야 제가 앞으로 돈 관리를 좀 더 똑바로 할 것 같기도 하고, 받은 퇴직금 그리고 차량 판 금액 등으로 현금 보유는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보증금 마련을 위한 약간의 대출금과 매월 빠져 나가는 월세, 그 외 보험금 등이 제 잔고를 압박했기 때문에 은행에 가서 제가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사람은 시간이 많고 적고와 상관없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의 생존을 위협할 때가 되면 무조건 움직인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 어플을 통해 제 계좌에서 매달 25일에 빠져 나가는 많은 금액을 따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귀찮아서, 게을러서 혹은 매달 돈 버니까 등등의 안일한 마음 때문에 절대 하지 않던 짓이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보험도 다 해지할까 했습니다. 어차피 제 계좌에서 빠져 나가는 금액이고 제 가치관은 현재가 중요하다는 거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히지 말자이거든요. 하지만 중간에 해약함으로 인해 발생되는 손해도 무시하지 못하고,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고 해 당장의 해약은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항목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현대캐피탈에서 매달 360,995원씩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상했습니다. 분명히 작년 11월에 600여만원을 완납했다고 들었거든요. 게다가 12월에는 이 돈이 빠져 나가지 않다가 해가 바뀌고 올해 1월부터 다시 이 금액이 현대캐피탈의 이름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름만 보고 저는 현대캐피탈 이 자식들이 몰래 내 돈을 가져가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따졌죠. 그러나 이들은 완납 이후 자기네에게 할부금이 입금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분명히 예금주명이 현대캐피탈인데 무슨 귀신 시나락 까 먹는 소리냐?! 결국 은행에 직접 가서 진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입금되고 있는 계좌의 예금주는 우리 어머니였더라구요. 어머니께서 계좌 이체 해지를 안 해 놓고 계셨던 거더라구요. 처음에는 현대캐피탈에 새어 들어간 6개월 간의 할부금을 돌려 받을 생각에 설렜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머니에게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냥 어머니께 용돈 드렸단 생각을 하며 마무리 지었습니다. 단, 내일 이체될 금액은 조정해 두었죠.




일련의 차량 할부 사태를 겪으며 아, 제가 아직 어른이 덜 됐구나 란 생각에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내 돈이 어디로 들어 가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글 쓰며 돈 많이 벌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원래는 내가 가입되어 있는 보험 상품이 뭔지 다 따져 보고 필요성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물 밀듯 밀려 들어오는 부끄러움 때문에 바쁘게 영업점을 빠져 나왔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적 업무조차 뒤로 미뤄 두었다가 이번에 하게 되고 나니 제 자신을 좀 더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군가 눈 뜨고 코 베어 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이번 주말엔 꼭 내가 가입되어 있는 보험 상품을 점검해 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약간의 철학적 메시지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무적인 자기 분석 역시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게 벌어 놓은 돈이 어떻게 쌓이고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철학적 자아 확인 못지않게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오늘을 즐기자는 메시지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오늘을 즐기는 것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오늘을 현명하게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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