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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인 인정과 공감은 정답이 아니다.

그들이 홀로서기를 할 수있는 내성을 길러주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끌어드리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내 주변엔 과거의 나와 비슷한 사람이 모이게 된다.


난 과거에 지우고 싶은 과거가 많은 사람이다.

어릴 적 심한 따돌림 때문에 상처 받은 적도 있었고

그때문에 사람에 대한 불신도 많았고

피해의식도 많아 남탓하는 것도 일수였고

나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앞뒤 꽉막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과거의 내 모습을 한 사람들이 나를 유독 찾아온다.

왜 나를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어하고

변화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나를 고수하고

자존감이 바닦인데도 허세를 부리고

내 잘못을 돌아보기보단 남의 허물부터 들춰내는...


그리고 특히 그 모든 사람 중에 공통점은

그로 인해 외로운 사람들이라는 거였다.


이런 외로운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디에도 마땅히 기댈 곳이 없다는 거였는데

그들에게 기댈 곳을 마련하기 위해

(사실 내가 기댈 곳이 간절히 필요해서)

만든 작은 모임이 있다.


우리는 그 모임에서 홀로 모였지만

'함께'가 됐다.

늘 소외되고 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곳에서

어느새 대화의 주체가 되고,

어느때보다 밝게 웃고 떠들고 즐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이해도가 높아질 수록

서로에게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발전을 위한 충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중 몇몇은 직설적인 발언에 상처받아

잠시 모임을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온다.

왜냐면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 문을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모임에서 더욱 날카로운 총대를 매는 역할을 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모든 것에 다 민감해서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남들보다 많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심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경우,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아

소위 보통 사람의 시선에서는 '저 사람 이상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건 외부의 자극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고,

자극에 적응할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모임이 그걸 학습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언제든 누구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있는(그게 부정적인 반응을 이끌던 긍정의 반응을 이끌던 관계없이 적응할 수 있는)사회성과 더불어 인간관계에 대해 적응하는 경험과 크고 작은 상처를 극복하는 내성을 길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모임이기에 내가 바른 소리를 해줄 수 있는 곧은 심지가 되어줘야 이 모임의 색깔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거라 생각해서 스스로 감성적이기보다 이성적인 모임의 리더가 되기로 결정했다.


어릴 적 내가 정말 크게 슬럼프에 빠졌을 때

매몰차게 나를 몰아붙이고 나를 호되게 혼내주던 한 언니가 있었는데

그때 믿던 사람에게 위로와 공감 대신 다가온

너한테 실망했다는 말이

그당시 너무 큰 상처로 다가왔었는데

이내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런 바른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이 한 말이

나를 위한 것일 거란 믿음 한줄을 가슴에 새겨놓으니 그 날카로운 충고가 어느새 따뜻하게 느껴지고

내가 생각지 못했던 나의 못난 부분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도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람에게 입에 발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타인의 입장에서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게 객관적인 조언을 아끼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단, 그 안에는 충분한 믿음과 신뢰가 쌓이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을 첫 번째로 여기는 마음이 늘 존재했기 때문에 내 주변엔 오래알고 지낸  사람이 특히 많다.


난 무조건적인 인정과 공감을 주는 모임에 대한 해로움을 안다.

그런 모임에서 모두가 같은 색을 내고 그 자리에선 서로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공감해주지만,

사실 그 모임을 벗어나 개인적으로 따로 만남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장소에 있던 내게 유독 친절하고 깊이 공감해주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없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갭이 크면 클수록 다가오는 충격도 크다.


물론 긍정의 에너지에 대한 효과와 전파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획일화된 방식으로 분위기 몰이를 통해 사람을 바꾸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남과 다르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그리고 자신의 색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 마땅히 그럴 수 있다는 걸, 그게 나쁘거나 부끄러운게 아니란 걸 느끼게 해주는 것과 더불어 내 그러한 의견에 누군가는 반대되는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과 그게 타인이 날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는 쿨한 마음을 갖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환경적인 쏠림에 의한 수동적 의사결정이 아닌 자기 판단에 의한 능동적 의사결정이 될 때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선택을 믿는 마음 내 주관과 사상 그리고 철학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건 긍정의 경험만으로는 만들어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깊이있는 인간관계는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불꽃튀는 크고 작은 부딪힘을 통해 다져지고 무뎌지며 완성된다.

그러니 부정의 경험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내성을 기르자.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라는

전제를 두고! ^^


#친절한세인씨 의 #세인생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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