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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reet

쉼 속에 답이 있다.

벌써 11년이 지났지만,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도시의 거리가 있다.

바로 호주 시드니 시티.



2007년, 내 나이 24살

태어나 처음으로 취향이라는 것을 가져본 때다.

남들이 좋다 가봐라 해봐라 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내 발길이 가는데로 걷고 보고 만져가며  

처음으로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나만의 아지트 지도도 만들었다.


늘 시작은 Town Hall 역 이었다.

발 편한 플랫슈즈를 신고, 카메라 한대를 어깨에 걸치고, 

비상금 30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난 뒤, 바로 Go!   

Pitt 스트릿에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한 컵케잌 가게에서 오전에만 팔던 

가성비 최고였던 치킨랩 하나로 허기를 채우고,

Hyde Park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그린티 프라프치노 그란데 사이즈를 테이크 아웃해 걷기 시작한다.



해 좋은 거리를 걷는 것을 굳이 마다하고 

Queen Victoria Buiding(QVB)건물 안으로 들어가

초호화 명품 매장을 가로질러 가며 사람을 구경한다.

그 비싼 명품을 여럿 사서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의외로 겉모습이 소박하다.

여기서 노브랜드에 올 화이트로 깔맞춤한 반팔 반바지에 쪼리 신고 다니는 조지 크루니를 만났을 때,

풀 정장에 운동화 신고 당당히 백팩매고 케리어 끄는 호주 사람들을 늘상 볼 때마다,

'격'이라는 것보다 자신의 '편안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여기 사람들의 사상에 격하게 동의하게 됐다.

남들 시선 따윈 상관없이 나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듯 말이다.  



건물 끝에서 끝을 직진으로 가로질러 나오면

George St.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부터가 바로 내 세상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내가 제일 좋아하던 서점이 있다.

입구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은 규모처럼 보이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지하층까지 빼곡히 책이 진열되어 있는

꽤 규모가 있는 서점이었다.


나는 서점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종이냄새가 느껴지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책인데도,

글씨를 그림처럼 읽고 아름답다 느끼고,

그림이 있는 책은 내 멋대로 해석하며, 혼자 키득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3년 반을 살면서 그리 자주 오갔던 서점인데도

아이러니하게 단 한권의 책도 사지 않았다.)


서점에서 나와 들어간 곳은 바로 카메라 가게였다.

나는 토이카메라 수집가였고, 여전히 아날로그에 목숨걸며, 필름카메라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데,  

여기서 완전 디지털화되었고, 이때 산요 작티라는 수중 카메라를 샀었는데,

덕분에 호주 바다에서 스노쿨링하며 물고기 영상도 찍어보는 호사도 누렸다. 


다음 행선지는 애플 스토어였다.

보기드문 현대적인 건물 인테리어에 미래에 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곳이었는데,

신제품이 나왔단 소식을 들으면 총총 달려가 제품을 만지막 만지작 거리며 눈팅만 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 다음부턴 목적지까지는 직선 거리가 쭉 이어진다.

그러다 너무 지루하다 느껴지면,

윈야드 역 쪽으로 쓱~ 빠져 자주가던 레코드 샵에 들린다.

헤드폰을 끼고 음악에 빠지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걸 알기에

시계를 보면서 이때면 출발!땅! 시간을 정해놓고, 음악을 듣는다.

슬플 땐 더 슬픈 음악을 들었고, 기분 좋을 땐 더 신나는 노래를 들었다.

가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멜로디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선이 같은 노래를 들으면 몰래 훌쩍거리기도,

숨죽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도 했다.



잔뜩 에너지를 충전한 뒤 아주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을 바로 내가 사랑하는 거리... The Rock다.

여기는 주말이면 플리마켓이 열린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다니며 아기자기한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둘러 보고,

'정성'이라는 것이 깃든 물건에 애정이 가 수중에 있는 돈의 거의 대부분을 투자해 결국 뭐 하나든 사고, 
셀러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길거리 음식을 사 아무대고 걸터 앉아 요기를 채운다.

그리고 늘 어김없이 MCA(Museum of Contemporary Art)에 들러 전시를 관람한다.

3년 반을 있으며 MCA에서 열리는 전시는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다 봤다.

같은 전시도 몇 번이고 또 보곤 했다.


작가도 작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만의 언어로 나만의 해석을 통해, 나만의 스토리를 입혔다.


MCA에서 만나게 된 작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쿠사마 야사이라는 일본 작가였는데, 

알고보니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2008년 MCA에서 그녀의 작품 중 Infinity Mirrored Room이라는 것을 체험했을 때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할 만큼 숨막히는 환타지를 경험했고,

그녀의 전시를 본 이후 도트 무늬를 볼 때마다 언제고 그녀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싸이월드에 너무 인상적이어서 적어놓은 글귀가 있었는데, 

I'm not influenced by any artists.        
Kusama is always Kusama.


나는 어떤 아티스트에게도 영향받지 않았다.

쿠사마는 그냥 쿠사마다.


이 글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늘 외우고 있을 만큼,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글귀이고,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휴먼브랜딩이란 아이디어도 어찌보면 이때 받은 영감과

쿠사마 = 도트, 나 = ?  라는 공식에 어떤 것을 대입해야할까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갖게 해준

그녀로부터 나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과거의 많은 것을 연결된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딜가도 기록에 남기고, 늘 사진을 많이 찍는 이유는,

과거의 이미지가 더 구체적일 수록 내 기억회로는 애니메이션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미지를 통해 그때 나누던 대화를 기억해 내기도 하고,

그때 함께 였던 사람과의 관계나 내 정서적 느낌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사진 한 장에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웜홀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 과거에 다녀오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시드니 시티 한복판을 걷다 돌아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나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그 시간 그때 그 거리...

그 거리를 걷고 난 뒤, 한적한 지하철 2층 좌석에 앉아 너무 많이 걸어 뻐근한 두다리 쭉 펴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센 수압으로 뜨거운 물을 팡팡 틀어놓고, 샤워부스에 쪼그려 앉아 정수리부터 한참을 물을 맞으며 피로를 풀다 깜박 잠이 들라 싶을 때면 머리도 채 못말리고 침대로 돌아와 침 질질 흘리고 자는지도 모르고 단잠에 들어 눈 떠보면 아침이었던 그 기분...

그래서 다 잊고 다시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던 나만의 아지트 지도 덕분에,

늘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오로지 나에게만 통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을 다시 회복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깃든 공간이나 상황,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들의 방법이 아닌 나만의 방법을 찾아, 필요하다면 언제고 나를 다시 깨우자. 


'나는 언제나 나니까'






P.S

사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의 주제는 나를 회복하는 에너지가 깃든, 나를 충전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라!라는 것이었는데,

글을 전개해 나가면서 소름이 끼칠만큼 닭살이 돋았다.

왜냐하면 나를 회복하고 충전하는 방법이었던 그때의 그 공간들과 관련된 일들을 지금 현재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한다면?

쉴 때 하는 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하는 일, 해도 일이라 느껴지지 않고 즐거운 일이라고 늘 이야기했었는데,

그 일이 지금의 내 일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일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라는 확신이 다시 느껴지고나니 현재의 삶에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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