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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우리 외할머니

받은 것만 기억하는 신기한 사람


저희 외할머니는 제게 참 각별한 존재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

주소지를 옮겨야 했던 저는 집과 학교가 너무 멀어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고등학교 3년의 사춘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늘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던 제가 책 한 장이라도 더 보고 가려고 온 신경이 날카로워져 털끝만 건드려도 폭발하던 예민할 때에도

저를 무장해제시키는 건 바로 할머니였습니다.


학교는 늦어도 밥은 먹고 가야 된다며 늘 아침 상을 거하게 차려주시고,

공부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이만치 했음 됐다고 밥 먹으라고 책 덮어버리는 할머니였지만,

손녀 밥 한술 더 떠먹이려는 할머니 마음을 알기에 그런 할머니께 짜증내는 못된 손녀딸이 되기 싫어 할머니 앞에서 하하호호 웃다 보니 어느새 그 고통스럽다던 수험생 시절이 다 지나갔었거든요.


가끔은 더 자고 싶은 날이면 학교 개교기념일이라고 할머니를 속이고 학교를 빼먹기도 하고, 수능 100일 전날은 백일주 마신다고 술 먹고 들어와서 냄새 풀풀 풍기며 담날 아침 북엇국이 먹고 싶다고 조르던 저였지만, 할머닌 진짜 몰라서인지 아니면 손녀딸을 너무 철저하게 믿어서인지 늘 제 말을 굳게 믿어주시고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면서 저는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할머니와 자연스럽게 다시 떨어져 지내며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는데, 할머니와의 고등학교 3년의 함께 지낸 정이 너무 커서인지 늘 할머니와 엄마는 제게 동급일만큼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한 번은 연영과 연기수업 중 눈물연기 시간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CD플레이어로 슬픈 연주곡을 들려주며, 지금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슬픈 상황을 떠올려보고 울어보라고 했는데, 전 연기전공도 아니고 스텝 전공이었지만 40명의 동급생 중 두 번째로 가장 빨리 그리고 닭똥 같은 눈물을 끝없이 쏟아내 모두가 놀랐었는데,

그때 제가 떠올렸던 건 '만약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 되던 해에는 할머니가 사시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집값이 서울에서 제일 싼 곳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할머니를 자주 뵈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살기 바빠, 애 키우기 바빠 자주 찾아뵙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간혹 가다 할머니를 뵈러 가면 부쩍 쇠약해지시고 입맛도 없으셔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모습을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며 할머니의 연세를 손꼽아보니 두려움이 생겼어요.

정말 할머니를 떠나보내야 하는 준비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 날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뵙곤 했어요.


한 번은 제가 TV에 나오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께 방송시간을 알려드렸더니 노인복지관에 가셔서 다 같이 모여 단체관람을 하시면서 그렇게 손녀딸 자랑을 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껜 제가 너무나 자랑스러운 손녀딸인 거죠.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에 할머니께 깜짝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아 2016년 말에 출간한 책의 에필로그에 할머니의 성함과 사랑한다는 마음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러 갔는데, 할머니가 주무셔서 집 문 앞에 가지런히 책을 두고 왔어요.

그런데 아침에 책을 확인하고 할머니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세인이 네가 책에 나온다. 우리 손녀딸이 이렇게 똑똑했나! 할머니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하시며 너무나 감격해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너무 좋아하시는 할머니 모습을 뵈니 저 역시도 너무나 가슴 벅차고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최근에 함께 살던 삼촌이 지방에 일로 내려가며 혼자 지내게 된 할머니가 걱정돼 저녁을 함께 먹으러 할머니 댁에 가며 계란 한 판을 사 갔습니다.

명절 때 할머니께서 계란 값이 비싸서 사 먹을 엄두가 안 난다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서 본의 아니게 계란 금식을 하고 계실 할머니란 걸 빤히 알기에 선물로 준비해 갔어요. 




'할머니 계란 비싸다고 한 번도 안 사 먹었지?'물어보니,

'우째 알았나! 요즘 계란 못 사 먹는다. 하도~ 비싸서.'

'그럴까 봐 내가 사 왔어. 할머니 계란 요리 팍팍해 먹어 내가 또 사다 줄게.' 했더니


천사 같던 할머니는 눈이 휘 둥굴 해져 이내 버럭 화를 냅니다.

'돈도 없는 게 쓸데없이 또 돈을 썼나! 얼마 전에도 할미 눈길에 밖에 못 나간다고 갈비탕 2개나 사다 주고, 새해라고 선물사 오고 용돈 주고, 오늘도 그 비싼 계란 사 온다고 이래저래 돈 쓰고 그럼 어떻게! 할미 집에 올 때는 빈손으로 오라니까!'


아니 다른 건 그렇게 잘 까먹고 깜빡깜빡하시면서

제가 해준 건 어떻게 그렇게 빠짐없이 하나하나 다 기억하시는지...

우리 할머니의 뇌구조는 준 것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신기하게도 받은 것만 기억하는 겁니다.

때론 너무 작은 걸 해 드려 부끄러울 만큼 소소한 건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제게 받은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십니다.


사람은 받은 것이 많아지다 보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고 

고마움을 잊고 익숙해지게 마련이고, 

자신이 준 건 기가 막히게 기억하면서도 받은 건 다 잊고 마는데,

저희 할머니의 뇌는 전혀 반대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젠 주는 것보다 늘 받는 입장이 된 할머니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아마도 그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신 걸까요?

뭐가 됐든 덕분에 오늘도 할머니와 저는 만 원짜리 계란 한 판에 너무 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다."




친절한 세인씨의 세인생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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