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의 히로애락
2025년 한 해는 내게 처음으로 ‘호사’라는 단어를 허락한 시간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라기보다, 삶이 잠시 속도를 늦추어 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내 호흡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해가 기울어 가는 지금, 나는 조용히 한 해의 끝자락에 앉아 나 자신을 바라본다.
예년의 연말은 늘 비슷했다. 한 해 동안 무엇인가를 채우고 또 채우다가, 연초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텅 빈 그릇 앞에 서야 했다. 그래서 연말이라는 시간은 늘 아쉬웠고, 가능한 한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허탈함이 예고된 출발선 앞에서, 잠시나마 즐거움을 최대한 끌어당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성과도, 평가를 기다리는 마음도 없다. 오히려 내년에는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 어떤 새로운 장면이 펼쳐질지에 대한 기대가 앞선다. 모든 것을 비우고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아니라, 올 한 해 동안 쌓아 올린 경험 위에 조용히 다음 층을 얹으려는 찰나의 기분이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이다. 땅속에서 막 고개를 내민 새싹이 햇볕을 만나 스스로의 방향을 정하는 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 비유는 참 정확하다. 그리고 다가오는 내년은 말띠 해, 병오년(丙午年). ‘불이 겹치는 해’라 불리며, 이동과 변화, 교류를 상징한다. 가만히 있으면 손해가 되고, 무리하면 탈이 난다는 말도 따라온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년은, 다시 움직이는 해라고.
시골집 하나를 정하고, 자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새로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눴다. 체육센터에서는 형님들과 아줌마들, 할머니들과 하루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여전히 성당 중창단에서 성가를 부르며 한 주를 정리한다. 브런치스토리에서는 작가로 선정되어 글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지난달부터는 그림과 서예를 시작했다. 첫 출조를 통해 낚시라는 세계에도 발을 들였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면 꽤 많은 것을 해낸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그중 무엇 하나 ‘이것이다’ 하고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마도 가장 또렷한 시간은 지난 10월일 것이다. 「별이 보이지 않던 밤」이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브런치북에 올렸다. 약간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동시에 그 글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Chapter 18까지 써 내려가는 동안, 나는 오래전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스무 살도 아니고, 어쩌면 열 살 즈음의 나. 대부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만의 우주를 상상하던, 작은 어린 왕자로.
글을 쓴다는 일은 참으로 두렵고도 신기하다. 손가락으로 두드린 문장 몇 줄이 어떤 세계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관계를 부서뜨리기도 한다. 사랑이 생기고, 이별이 오고,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들이 현실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 무한한 창작의 공간은 놀라울 만큼 자유롭고, 그래서 더 매혹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30여 년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가 나 자신을 다시 만났고, 그해 가을 10월의 한 달은 오래 기억될 작은 축복이 되었다.
텃밭에서는 모두 스물네 가지 작물을 길렀다. 그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고구마였다. 5월에 심어 11월에 수확했는데, 캐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그럼에도 고구마는 나누기에 가장 좋은 작물이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핑계가 되어 주고, 말보다 먼저 마음을 건네준다. 이제 집에 남아 있는 양도 거의 바닥을 보인다. 수확철에는 나와 아내를 중심으로 친구 두 명씩, 두 팀이 일손을 보태 주었고, 그들은 10월의 가을을 한껏 누리고 돌아갔다. 비어 가는 고구마 상자를 바라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계절의 끝을 실감한다.
내년에는 재배 품목을 대폭 줄일 생각이다. 시기별 모종과 면적, 수량을 미리 그려 보니, 한 해를 정리한 결산보고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초당옥수수, 고추, 감자, 강낭콩, 호박, 오이, 당근, 무. 이름만 불러도 벌써 다음 계절의 풍경이 그려진다.
올해의 공식적인 모임들은 거의 막을 내렸다. 내년을 바라보면, 봄 무렵의 해외여행 하나, 작물 재배의 재정비, 수영 상급반으로의 승급, 탁구장에서의 자리 잡기가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에서는 새로운 단편소설의 마무리가 남아 있고, 주변을 둘러보며 또 다른 터전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재취업이나 새로운 일 역시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멈추지 않은 채 생각을 이어 가고 있다.
2026년 병오년은 이사와 이동, 그리고 관계의 재정리를 뜻하는 해라고 한다. 그해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천천히 설계를 시작한다. 비우기보다는 이어 가기 위해, 멈추기보다는 다시 움직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