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이야기

고구마의 희로애락

by Blue paper


작년의 고구마는 내게 하나의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았다.
수확은 많았고, 보관은 서툴렀다. 그렇게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나는 시장에서 고구마를 사 먹고 있었다.


처음 고구마를 심을 때의 계획은 단출했다.
멀칭 한 고랑 중 일부, 많아야 두 단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옆집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고구마 모종이 네 단. 거절도 못한 채 받아 들고 나니, 선택지는 하나였다. 심을 수밖에.


5월 16일 금요일, 그날은 서울로 철수하기로 한 날이었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아침부터 서둘러 밭에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떨어지는 빗방울.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두 시간쯤이면 끝나겠지.’
오전 9시에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30분이 지났는데 반 줄도 못 갔다. 허리는 점점 굳어가고, 몇 걸음마다 허리를 펴야 했다. 빗속에서 쭈그리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밭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렇게 하시면 하루 종일 해도 다 못해요.”

윗집 아저씨였다.
지난번 이사 인사로 드린 작은 선물을 기억하고 계셨는지, 말을 건네시더니 모종을 몇 개 집어 드셨다. 왼손에 모종을 대여섯 개 쥐고, 엄지로 하나씩 밀어내며 오른손의 작업 고리로 ‘슥, 슥’. 순식간에 모종이 심어졌다.

나는 모종 하나 심고, 다시 꺼내고, 또 심고… 그 모습을 보시다 못해 비를 맞으며 내려오신 것이었다.

덕분에 종일 걸릴 줄 알았던 작업은 오후 1시 전에 끝났다. 예정대로 서울에 올라갈 수 있었고, 약속한 저녁도 지킬 수 있었다.


그 뒤로 고구마는 정말 ‘알아서’ 컸다.
물을 따로 주지도 않았고, 순 치기나 농약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묵묵히, 성실하게 자라났다. 여름쯤엔 새로 올라온 고구마 순을 조금 잘라 손질해 먹었는데, 그것도 꽤 괜찮은 반찬이 되었다. 다만 손에 시커먼 흙물이 들러붙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을이 오고 찬바람이 불자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순을 미리 정리하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두라는 사람도 있었다. 초보 농사꾼인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두자. 지금까지도 잘 자랐는데, 괜히 손대서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10월 중순, 한쪽을 살짝 캐보니 고구마는 이미 먹기 좋은 크기로 자라 있었다. 붉은빛이 어찌나 선명한지, 괜히 신기하고 대견했다. 언제 캐야 하나 몰라 주인아주머니께 여쭤보니 “추석 지나고, 아침서리 내리기 전”이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추석이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첫 수확에 나섰다.
그런데 한 고랑도 반을 못 가 서로 지쳐버렸다. 그때 또다시 지나가던 어르신 두 분이 훈수를 두신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여. 먼저 순을 다 베고, 그다음에 캐야지.”

우리는 한 뿌리 캐고, 다시 순 뽑고… 일을 두 번 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시간쯤 하다 그만두고,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생각해 낸 건 친구들의 도움과 나눔을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함께하며, 텃밭 체험 삼아 고구마 캐기를 하기로 했다. 다들 반가워했고, 그중 한 친구는 알고 보니 어릴 적 농사일을 꽤 도왔던 실력자였다. 그날 이후 고구마 수확의 속도와 능률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세 팀이 다녀간 뒤에야 집 앞 텃밭의 고구마를 모두 캘 수 있었다.


수확은 끝났지만 일은 남아 있었다.
말리고, 골라내고, 포장하고. 그렇게 다 나누고 나니 작업 박스로 다섯 상자 정도가 남았다. 지인들, 형님, 누나, 어머니께 택배를 보내고 인사를 받으니, 꽤 뿌듯했다.
확실히 나눔의 기쁨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쪽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뉴스에서 말하던 ‘기부의 행복’이 조금은 이해됐다.


다만 아쉬움도 있었다.
보관이었다. 처음 수확이다 보니 상처 난 고구마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상처 난 것들은 바로 씻어 말리거나 먹었어야 했는데, 다른 것들과 함께 두었다가 섬유화가 되어 버린 것이 많았다. 친구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많이 버려야 했다.

그래도 남은 두 상자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나 지인을 만날 때마다 쇼핑백에 담아 건네니 반응이 좋았고, 자연스레 연락도 이어졌다.

처음엔 모종이 많아 힘들어 후회했고, 수확량이 많아 또 힘들어했다. 그런데 고구마는 5월부터 10월, 아니 11월까지 단 한 번도 보살핌을 요구하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기엔 더없이 좋은 작물이었다.


최근에는 비닐하우스에서 화목난로에 불을 피우고 군고구마를 해 먹었다. 그 단맛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먹어본 고구마는 물론, 어떤 최고등급의 고기보다도 인상 깊었다.

다만 한 가지.
너무 열심히 나누다 보니 정작 우리가 먹을 몫은 남지 않았다. 지난주엔 결국 마트에서 고구마를 사 먹었다. 내년엔 조금은 덜 나누고, 조금은 더 남겨두어야겠다.

그래도 괜찮다.
내년엔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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