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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녀책빵

허송세월

김훈 산문 ㅣ 나남

by 친절한 마녀

#시작


시절이 하 수상(殊常) 하니 뒤숭숭하다.

봄날의 신생처럼 생동감에 겨워 그러하면 좋으련만
뒤틀린 어깃장에 화들짝 놀라 그러하니 참담하다.


나를 설명하는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사들고
얼마나 설레었던지 첫 장부터 넘기질 못하고
필사를 해야 하나, 글공부를 해야 하나 아까워서
한 장 한 장에 밑줄 긋고 어휘를 보며 말맛을 음미했더랬다.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없는데
유독 김훈 작가의 글에는 끌린다.
10여 년도 더 된 시절에 그의 #칼의노래를 읽고는
그 문체에 매료되고 이순신 장군의 팬이 된 것이 계기이지 싶다.


학익진(鶴翼陣),
부채꼴 모양으로 적을 감싸는 진법에 반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관계 맺는 방식에 응용해
포용력을 키우려고 애쓰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노작가가 된
그의 산문집을 읽는 건 대단히 설레는 일이었다.
강한 문체로 휘몰아칠 것 같았던 기대와 달리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건조함이 공존했다.


켜켜이 쌓인 시대의 질곡을 지나온 노작가의 현실은
어느 노인과 다름없는 늙음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늙음을 관찰하고 늙어가는 자신으로 유머를 하고
늙음에 대한 통찰로 즐거움을 찾는 데서 그의 다름이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삶을 관통하는 시선으로 사물과 자연, 현상들을

고찰하는 그의 글이 더 크게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힘 빠진듯한 유연한 글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고
건조한 문체에서 군더더기 없는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그가 보내는 허송세월에 합류해 지금의 삶을

더 관찰하고 이해하며 포용하고 개선시키고픈
마음이 컸건만, 궤변 같은 사태가 벌어지며
전 국민의 대통합과 문해력이 풀가동 되는 통에


그만 나는 이 설레는 책과의 조우를 뒤숭숭한
마음으로 초서 하게 되어 원망과 비통한 마음이
뒤엉켜 참담하기 그지없다. 반드시 그 밤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이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까 싶다.

P110 중에서

이 시대에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을 떨쳐 내기가 어렵다.
말이 소통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이 시대는 좁은 출구를 겨우 찾아갈 수
있을 터인데, 말이 적대하는 전투에 동원된 시대에 나의 말은
무력하게 들리지만, 무의미하지는 않기를 나는 바란다.ㅤ



#허송세월 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건만, 저기 위 누군가에게는 ‘허송세월 말라!’
전하 고프니 이건 또 이 시대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나의 아이러니일 터.




#읽는 중에


삶에는 부사가 필요하다

요즘 종종 드는 생각이다.

명사와 동사만으로는 삶의 정서와

감각을 다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선인들의 좋은 글을 보며

자신의 오류를 증명하면서도

스스로는 형용사나 부사를 타박하며

문장에서 쫓아내려 한다, 고 고백한다.



P144 중에서

형용사나 부사는 그 단어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문장의 논리적 기능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서 사물이나 사유를 의탁하기에는 허약한 품사라는 의구심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형용사나 부사를 타박하면서 문장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 단어를 부리는 솜씨가 모자라서 제자리에 들여앉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모르지 않지만, 나의 글은 여전히 너무 수다스럽다.



'여전히'와 '너무'가 작가가 말한 대로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손 치더라도

그 두 부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모를 것이다.



언어를 대하고 글을 대하는 작가의 고뇌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의 글은 여전히 너무 수다스럽다'가

'나의 글은 수다스럽다'보다 더 고뇌스럽다.



아직 삶에 초연하지 못한 내게는 부사가 필요하다.

부사는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주니

허송세월할 때와 아닐 때를 의탁할 수 있다.

'잘' '열심히'가 동사 앞에 필요한 때와 아닌 때



동사만으로는 부질없게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냥 '하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잘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이,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부사가 없다면 삶은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맹물처럼 흘러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는 내가 삶에 초연하지 못하고

욕심이 많은 까닭에 생긴 두려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왜 미친 듯이 살지 못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드는 요즘이다.

이대로 사는 것이 맞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동사 앞에 알맞은 부사가 필요한 때이다.



맹탕 같은 삶에 부사가 첨가된다면

덧없고 헛되어 보이는 세월도

웃음 짓고 눈물지을 수 있는 추억이 되어

풍성한 허송세월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도 아닌데

요 며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뉴스를 보고 사고 영상을 보고 SNS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더군요.


희생자들의 사연, 유가족의 슬픔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고

안간힘을 쓰던 기장님의 사진

어느 하나 마음을 휘젓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을 집어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책장을 끝까지 넘겼습니다.

너무 많은 말들에 밑줄을 그은지라

어떻게 마무리 글을 쓸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아픈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P157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저무는 저녁에 허균, 차천로, 김득신의
독서를 생각하는 일은 슬프다.
독서는 쉽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P114

이날 이후 10년이 흘렀다. 이 1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전통적 주류를
이루어 온 세력은 이 참사와 그 희생자들을 타자화하고 소수화해서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언설 행위를 계속해 왔고, 이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P289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욕망과 당파성으로 무장한 입들이
여러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무기화된 언어를 발포해서
공유지를 폭격하고 있습니다.



P298

저는 생활을 통과해 나온 사소한 언어로 표현되는 정의가 구현되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언어는 훨씬 더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기를 통과해 나오지 않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고,
프레임이 빚어내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고,
프레임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 일은 괴롭고,
말을 해도 들리지 않으리라는 예감은 괴롭고,
전체와 부분에 대한 성찰이 없는 말을 듣는 일은 괴롭습니다.



아직 사고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추측과 사실이 아닌 의견은 2차 가해가 됨을

알기에 듣지 않고 말하기를 조심히 하려 합니다.

애도와 위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함에

있어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희생자 분들과

유가족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임도 명심하겠습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빌며

생존자,유가족, 구조 인력 모두를 위해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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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을 맞는 모든 분들의

새해 안전도 기원하겠습니다.

새해 안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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