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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마녀 Jun 22. 2021

낳아줘서 고마워

생일맞이 드라마 한 편을 찍다

"엄마, 내 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마"

"정말? 그래도 돼?"

"응, 그래도 돼. 그냥 아침에 미역국만 끓여주시면 돼."

"안 서운하겠어?"

"뭐가 서운해. 한 개도 안 서운하니까 진짜 아무것도 하지 마셔"

"알았어. 그럼 나야 편하지"


내 생일 일주일 전.  매년 강여사가 차려주는 생일날 아침상을 생각하니 올해도 준비하실까 싶어 미리 얘기를 꺼냈다.  올해는 더위가 일찍 시작돼 6월 아침에도 땀이 흐를 때가 많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강여사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딸내미 생일 상 차리겠다고 국 끓이고 전 부치고 생선을 구울 생각을 하니 아니다 싶었다.  


사실 내가 강여사의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착실하게 앉아 소화하지 못하는 이유도 한몫했다.  아침을 잘 안 먹는 데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입맛은 개떡 같아지고 시간에 헐레벌떡 쫓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강여사의 자식 생일날 루틴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강여사의 나이와 상황, 무엇보다 정성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내 생일은 뭔가 나 나름의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올해는 드라마 한 편을 찍어보자 생각했다.  왜 따듯한 가족 드라마 보면 정말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장면과 당연한데 특별한,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잘하지 않는 가슴 뜨거운 대사가 있지 않은가.  맨날 보면서 마음이 울컥하기나 했지, 그런 장면 그런 표현을 내가 해볼 생각을 꿈에라도 했었던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런 장면 우리 강여사도 경험하게 해 줘야지, 저런 말 우리 강여사한테도 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미룸이 후회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후부터.


"엄마, 내 생일날에는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한턱 쏠게"

"진짜? 뭐 먹을 건데?"

"엄마 좋아하는 거? 그날 엄마 먹고 싶은 거?"

" 나야 좋지.  근데 니 생일인데 니가 쏴? 엄마가 쏴야지"

" 이 오뉴월 땡볕에 딸내미 낳느라 고생했는데 엄마가 상 받아야지. 뭐 엄마가 쏴. 내가 쏘겠~어"


생일날 아침.  고소한 냄새가 코 속으로 훅 들어와 눈을 떴다.  '아, 강여사 또 뭐 했네 했어'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불 앞에 서서 전 부치고 생선을 굽고 있는 강여사. 내 몬산다 몬살아.  


"엄마 뭐해? 하지 말라니까 뭘 또 하고 계셔!!"

"아니. 뭐 안 했어. 그냥 호박 있어서 호박전 하고 오징어 있어서 부치고, 조기 냉장고에 있어서 그냥 그거 구운 거야."

"다했네 다했어. 뭐 그냥이야.  나가서 점심 먹자니까"

"그래 나가서 점심 먹어. 이건 이따 저녁에 와서 먹으면 되지.  그래도 미역국은 먹고 나갈 거지? 전복 넣었으니까 미역국은 조금 먹고 나가. 그럴 거지?"


못 말리는 강여사 정성에 턱없이 부족한 태도로 마지못해 먹는냥 미역국을 조금 호로록 들이켰다.  호강에 겨워 툴툴대는 어린애 마냥 어리광이 샘솟았다.  옷 갈아입는 딸 방까지 미역국을 대령하니 호로록 어리광이 어찌 안 나오겠는가.  게다가 봉투까지.  "아 정말, 봉투를 왜 주셔.  알았어 먹어 먹을게.  맛있네"  내가 이런 호강에 철딱서니 없는 어리광을 언제까지 부릴 수 있으려나.  뭐 눈에 뭔가 촉촉한 것이 맺히려는 데... 됐고.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강여사가 매년 생일에 주는 쌈지돈 선물


"내 배가 부르니 대통령도 안 부럽네. 니나노~~"

"배부르니까 우리 좀 걸을까? 엄마 다리 아프려나?"

"아냐, 걸을 수 있어 괜찮아. 우리 딸 커피 마셔야지. 커피숍으로 가자.  엄마가 커피 사줄게"

"아싸.  근데 괜찮겠어 커피숍까지?"

"어 지금까진 괜찮아"

 

강여사가 좋아하는 샤브샤브 식당에서 배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먹고 나왔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어 양산 하나를 펼쳐 강여사에게 드리웠다.  


"너도 써야지"


여름 친구는 반갑지 않다던 강여사가 내 팔짱을 끼었다.  


"안 더워? 엄마 덥잖아"

"아냐 지금은 괜찮아. 안 더워"

"천천히 걸어 엄마.  빨리 걸을 필요 없어"


한걸음 한걸음 느리게 느리게 더 느리게.  


1분에 한걸음을 옮기는 듯한 속도감이 기분 좋았다.  계속 강여사와 이런 속도여도 좋을 것 같았다.  어느덧 다다른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고 있노라니 뭐랄까 뭐 이런 게 행복인 건가 싶었다.  사실 난 이 나이가 되도록 행복이란 감정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아니 모른다.  근데 이게 행복이겠지 싶은 잔잔한 파도 같은 것이 가슴에서 출렁였다.


한낮의 슬로우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한 편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음먹었던 말을 이제 해야지 하는데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지더니 눈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러게 평소에 잘해야지 안 하던 짓하려니 몸이 이상하잖아.  뭐 대단한 말이라고 이러나 싶어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흔들릴 것 같은 목소리를 '흐음' 가다듬었다.  


"우리 강여사, 이 뙤약볕에 나 낳느라 고생 무지 많았어.  엄청 힘들었겠다”하며 강여사를 꼬옥 안았다.

그리고 오늘의 야심 멘트를 날렸다.


엄마, 나 잘 낳아줘서 고마워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우리 딸


오잉? 내가 드라마 찍는 걸 강여사가 알았나? 강여사의 뜻밖의 말에 또 한 번 목구멍에 파도가 쳤다.  웬 심파냐 싶어 목구멍 아래로 침을 다시 꾹 밀어 넣었다.


"나 잘 낳은 거 같아?"

"그럼. 잘 낳았지.  우리 딸 안 낳았으면 오늘같이 이런 좋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 잘 낳았지"


나는 강여사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사랑해 엄마" "나도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나도 더더 사랑해"

장난치듯 끌어안고 몸을 뱅뱅 돌렸다.  장난처럼 진심을 옮겼다.




뭐야 뭐야.  아~닭살이야~ 진짜 드라마 같잖아.   

쑥스러웠던 시간, 쑥스러웠던 말들.   그런데 하지 않으면 영영 더 쑥스러워질 것들.  그래서 후회하게 될 거란 걸 너무 잘 아는 것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이 다 드라마인데, 다른 세상을 연기하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것들이라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  


그래 이제부터라도 드라마 찍으면서 살지 .  그러면서 살면 되지 뭐.  명작이 별건가.  오래오래 두고두고 길이 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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