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전포동 반백 년 살아봤습니다.>_를 읽고.
{작가는 허락을 받지 않는다.]^^
최근에 올린 무화 작가님의 글 몇 편을 읽다가,
이 작가님의 처음 글이 궁금해졌다.
엄지 손가락으로, 폰 화면을 빠르게 비벼, 들여다본 첫 편이었지.
마치 오래된 흙냄새가 코끝을 건드리듯 마음이 흔들렸다.
글 속의 장면들은 화려하지 않았다. 삶의 가장 낮은 곳의 모습들.
땀, 모기, 수돗물, 비누, 전빵(지금의 편의점^^), 그리고 바람.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문장 하나하나에 고요히 스며 있었다.
찐덕거리지 않았다. 깔끔했다.
그런고 그 사소함이, 이상하리만큼 웅장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진실이 드러났다.
읽는 내내 나는 그 문장들의 질주에 숨을 맞추었다.
그러다 멈추고. 또 멈추고.
(무화 작가의 다른 글에서는 모르는 단어들도 많았다.ㅠㅠ. 나도 한국사람인데)
작가님은 마치 맨발로 세상의 바닥을 뛰는 사람 같았다.
글이 너무 솔직해서 미안할 정도였고,
솔직함이 지나쳐 아름다웠다.
그 문장들은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자부심도, 결핍도 풍요도 모두 한데 묶인 채, 그저 삶을 살아내는 목소리였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이상하게도 겸허해진다.
‘사는 일’이란 결국 이렇게 단단하고, 또 허무하구나 하고.
또한, 작가로서는 내 글이 한없이 초라해 짐을 느낀다.
무화 작가님의 글은 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었다.
손끝의 감각, 햇빛의 질감, 냄새와 소리의 리듬들이 하나의 사유가 되어 있었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사는 법,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나를 때린 주먹이었다.
읽는 동안 나는 내 몸을 다시 느꼈다.
내 손에 닿는 찬 물, 내 목을 타고 흐르는 바람,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그 모든 것이 ‘철학적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사유는 삶의 가장 가까운 곳, 우리가 늘 지나치는 하루의 냄새 속에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멍~~~ 했다.
좋은 글은 말을 줄이게 한다.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한다.
무화 작가님의 글이 그랬다.
고요히, 그러나 단단히 나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언어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많은데.
무화 작가님의 글은, 작고 느린 언어로 그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살아 있다는 건, 이렇게 작은 일들이 서로를 비추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