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DNA와 작가의 의무
여름밤이었다.
부엌에서 흘러나온 밥 짓는 소리, 마당 평상에 눕혀진 돗자리, 그리고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올려다본 별들. 그 별보다 더 선명했던 것은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질문도 없고 결론도 정해지지 않은 채, 말은 흘렀고 아이들은 그 흐름 위에 몸을 맡겼다.
한국의 옛날을 살았던 수많은 할머니들은, 기록되지 않은 서사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도서관이었고, 동시에 밤의 연출가였다.
이야기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마을의 공기처럼 공유되었고, 계절처럼 반복되었다.
무섭고 웃기고 슬프고 기이한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언젠가 말을 건네야 할 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이동했다.
이야기의 이동 경로는 집 안에 머물지 않았다.
장터에서는 판소리가 울렸고,
광대와 만담꾼은 웃음과 풍자를 풀어놓았다.
꼭두각시 인형은 나무로 된 몸을 빌려 인간의 욕망을 대신 말해주었다.
무성영화 시절, 화면은 침묵했지만 극장은 조용하지 않았다.
변사의 목소리가 서사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빈틈을 메우며, 관객의 감정을 끌어당겼다.
같은 영화라도 다른 변사를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살아났다.
라디오가 등장했을 때, 이야기는 다시 한번 몸을 바꾸었다.
얼굴 없는 목소리는 상상의 여백을 넓혔고,
청취자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세계를 그려냈다.
이야기는 기술과 충돌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태를 바꾸며 확장되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야기는 인식의 틀이다.
경험은 흩어져 있으나 서사는 그것을 연결한다.
기억은 이야기의 형태로 저장되고, 정체성 역시 서사적 자아로 구성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내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왔고 또 쓰고 있는가로 이어진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보았고 들었다.
신화에서 영화, 드라마에서 게임까지, 서사는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작가는 창조자이기 이전에 번역자다.
오래된 목소리를 오늘의 언어로 옮기고, 사라질 뻔한 감각을 현재의 감수성으로 되살린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는 개인의 고백을 넘어 공동의 사유로 확장된다.
쓰는 행위는 기억에 저항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잊히는 속도보다 조금 더 빠르게, 우리는 문장을 남긴다.
이야기가 우리 DNA를 따라 흐른다는 말은 은유처럼 들리지만, 실은 꽤 정확하다.
말과 서사로 세계를 조직해 온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었어도 좋고, 들었어도 좋고, 보았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손을 움직여 문장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전승의 고리에 참여한다.
쓰는 일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필연에 가깝다.
작가의 임무는 거창하지 않다.
흘러온 이야기를 붙잡아, 다시 흘려보내는 일.
그 사이에서 세계는 조금 더 이해 가능해지고, 삶은 잠시 덜 외로워진다.
오늘 밤, 무릎을 베고 누운 누군가를 떠올리며, 우리는 또 한 줄을 쓴다.
이야기는 그렇게 다음 사람에게로 건너간다.
돈을 벌려고 했다면 작가라는 직업은 아니다.
우리는 쓰는 게 목적이다.
작가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