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담장을 따라, 시대는 바뀌었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 사유

by 원성진 화가

비가 내린다.

홍제역 버스정류장에서 7025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에 내렸다.

그리고는 이유 없이 경복궁 담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크게 한 바퀴를 걸었다.

걷는 동안 담장은 하나의 사유의 벗이 되었다. 오른쪽은 안심해도 되는 그런 산책.

돌담의 돌 위에 쌓인 시간, 그 위를 미끄러지듯 스치는 바람,

진눈깨비가 잠시 방향을 잃는 밤이 오는 공기 속에서 우산을 쓴 발걸음은 더 느려졌다.

속도가 줄어들자 도시는 말을 아꼈고, 그 침묵 사이로 오래된 구조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경복궁의 담은 조선의 경계였다.

권력과 일상의 선,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기준, 질서를 가시화한 돌의 언어.

그 선을 따라 걷다 보니 조선과 한국 사이의 시간적 경계가 겹쳐졌다.

왕조는 사라졌고 국가는 바뀌었으나, 세계를 배열하는 감각은 쉽게 퇴장하지 않는다.

구조는 시대를 옮겨 다니며 다른 이름을 입는다.

혈통과 예법이 지배하던 질서는 숫자와 성과,

속도의 언어로 옮겨왔고, 중심을 세우고 주변을 배치하는 리듬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조주의 철학이 말하는 인간은 언제나 교차점에 서 있다.

개인은 출발점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언어가 먼저 있고, 제도가 먼저 있으며, 우리는 그 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뻗은 도로와 행정의 축,

그 위에 겹쳐진 상업과 주거의 층위는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문장은 이미 구성되어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리를 배정받는다.

주어와 서술어가 미리 놓인 문장 속에서 자유는 선택지의 형태로 제공된다.

익숙함은 의심을 지우고, 의심의 부재는 구조를 투명하게 만든다.


조선과 한국이 내밀하게 통하는 지점은 바로 이 투명성에 있다.

담장은 높아졌고, 경계는 더 촘촘해졌다.

눈에 보이던 축선은 보이지 않는 지표로 대체되었고,

권위는 알고리즘과 평가표의 얼굴을 얻었다.

우리는 중심을 향해 이동하며 주변으로 밀려나는 감각을 본능처럼 경계한다.

그 경계는 공간에만 있지 않다.

마음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멈춤을 불안으로, 사유를 지체로 번역한다.


진눈깨비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생각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왜 우리는 이런 날씨에도 밤거리를 헤매는가.

방향 없는 산책 이상의 힘이 우리를 밖으로 이끄는 듯했다.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속도의 구조와 함께 호흡하는 일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과 고립되어 있다는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걷는다.

몸을 이동시키며 생각의 좌표를 흔들고, 구조가 부여한 역할에서 잠시 이탈하려 한다.

걷기는 저항이라기보다 미세한 조정에 가깝다.

결국엔 자신이 놓인 위치를 다시 감각하는 행위다.


경복궁 담을 따라 도는 이 한 바퀴 또한, 탈출을 약속하지 않는다.

구조는 단단하고, 인간은 그 안에서 태어난다.

다만 구조를 배경으로 밀어내는 연습은 가능하다.

내가 걷고 있다고 믿었던 길이 이미 설계된 동선이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담장은 절대적인 선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돌의 결 사이로 시간이 스며 있고, 그 위를 지나간 수많은 발자국이 겹쳐 보인다.

개인의 크기는 줄어들지만, 시야는 넓어진다.

철학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세계를 바꾸기보다, 세계가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묻는 태도에서.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여전히 구조 속에 있다.

언어와 제도, 경제와 시선의 그물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구조를 인식하는 순간, 구조는 전경을 잃고 배경으로 물러난다.

경복궁의 담처럼 오래된 선을 따라 걷는 행위는 현재를 낯설게 만드는 방법이다.

낯섦은 사유의 문을 연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지,

그리고 아주 미세한 틈에서 다른 방향을 상상할 수 있는지 묻게 한다.


한 바퀴 돌아, 광화문 앞까지 왔다.

광화문의 파사드 미디어쇼는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언 몸을 녹이려, KT건물 2층에서 핫초코 한잔과 함께 광화문 광장을 내려다보며 앉았다.


건물을 나와 청계천으로 발길을 옮기자, 나타난 유등은 또 뭘 말하는지?


진눈깨비가 눈으로, 다시 비로, 다시 눈으로 뒤섞인 도시는 다시 일상의 소음을 되찾는다.


그렇게 오늘 담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구조는 조금 느슨해졌고, 생각은 그 틈으로 숨을 쉬었다.

이 작은 흔들림들이 쌓여 삶을 지탱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속도를 견디고, 경계를 넘나들며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이 시대 한국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도 사유를 포기하지 않고, 걷고, 버티고,

다시 내일을 향해 발을 내딛는 그 고요한 용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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