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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물리학: 프롤과 에필〉

제2부. 카페, 향기 (3)

by 원성진 화가

프롤은 화가였고, 에필은 성악가였다.

예술은 그들 사이의 언어이자 숨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예술, 시간, 기억, 사랑.

에필이 말했다.

“예술은 결국 시간의 재구성 같아요. 같은 장면을 반복하지만, 매번 다르게 느껴지죠.

기억 때문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 때문이에요.”

프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랑과 닮았네요. 같은 얼굴을 바라보지만, 그 안엔 매번 다른 계절이 자라죠.”

에필은 조용히 웃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떤 계절일까요?”

“아마도 봄. 아직 완전히 피지 않은.”


그 순간, 공기가 멈췄다.

커피의 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이 닿자, 세계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자동차 소리, 대화 소리, 시간의 소리마저 멎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마치 다음 장면이 이미 정해져 있는 연극처럼.


그날 밤, 프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속에서 그는 낯선 도시를 걸었다. 하늘에는 거대한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중심에 에필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시곗바늘에 닿자, 빛이 흩어졌다. 피가 아닌 시간의 파편이었다.


같은 시간, 에필도 꿈을 꾸었다.

그녀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 피는 별빛처럼 흩어져 프롤의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잠결에 속삭였다.

“사랑은… 시간을 잃는 연습이야.”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던 듯 두 사람은 다시 카페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둘 다 느꼈다. 서로의 꿈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아마 기억이 아니라 반복일지도 몰라요.”


그 말은 은유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다른 시간대에서 여러 번 이 장면을 반복해 왔다. 서로의 영혼이 서로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카페의 불빛이 어둑해지자 프롤은 노트를 꺼내 적었다.
“사랑이란, 시간의 틈새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가장 잔인한 실험이다.

향기로 시작된 이 감각은, 어쩌면 다른 생의 잔향일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 문장을 적는 순간, 카페의 조명이 깜빡였다.

유리창 밖의 풍경이 흔들리며 낯선 도시가 스쳐갔다. 금속빛 하늘, 공중열차, 그리고 3025년의 에필. 그녀가 먼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지만, 공간은 닫혔다. 모든 것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너는… 다른 시간의 사람이구나.”

그의 혼잣 말이 흩어질 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에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우리… 내일 이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프롤은 미소 지었다. 그 눈동자에는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번졌다.


그날 밤, 서울의 하늘 아래서 두 시간대가 잠시 겹쳤다.
카페 ‘OHOOO’의 벽에 쓰인 글자는 색을 잃어가며,
이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빛을 내뿜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이상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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