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엄마
분희는 열여덟 살의 나이에 진주로 시집왔다.
논산에 두고온 친정의 엄마와 동생들이 아직은 그리울 때.
진주에서도 떨어진 수곡이라는 시골 마을의 골목은 낯설었다. 바람은 맵고, 집안 어른들은 하나같이 무서웠다. 시댁의 마당엔 감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 하나만 남겨지는 계절 오면 추워서 너무 싫었다.
그래도.
돌아갈 차비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무서웠다.
그 시절의 결혼은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생의 배분이었다.
한 사람의 생을 다른 생에 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
가난은 두 사람의 몫을 나누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더 단단히 묶어버렸다.
스무 살, 분희는 둘째를 낳았다.
첫째는 고운 딸, 둘째는 세상에 겨우 붙은 아들이었다.
아이의 울음은 가늘었고, 젖을 빨던 입술은 늘 파래 있었다.
“숨이 짧아요, 아주머니. 디프테리아 같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숨이 짧다’는 말만은 알아들었다.
분희는 아들의 입에 손을 대보았다. 따뜻하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공포는, ‘숨’이 멎는다는 감각이다.
숨은 생명의 증거이자, 부재의 예고다.
분희는 그때 알았다.
사랑이란 결국 자식의 숨을 대신 쉬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약.이. 있.었.다.
병을 고쳐줄 혈청 주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값이.......
쌀 열 가마에 하나를 살 수 있었고,
세 개나 필요한데,
그것도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분희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벌이가 없다. 우짜것노. 그런 약은 부잣집 애들이 맞는 거라카더라.”
돈이 없다는 말은, 곧 생명을 살릴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었다.
가난은 신의 뜻이었고, 인간의 한계였으며, 사회의 냉담한 윤리였다.
밤이 내렸다.
하루종일 진주 골목골목을 다닌,
분희는 아들을 품에 안고 불빛이 조금이라도 남은 진주의 골목을 또 걸었다.
보이는 병원마다, 약국마다, 한의원 마다,
무당집까지 문을 두드렸다.
“아이 좀 봐주세요. 제 아가 숨이... 숨이...”
날이 새도록, 수곡에서 산을 넘고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시내를 걸어 걸어.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한 사람의 여자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견디며 사랑의 형식을 증명해 낸 실존의 철학자다.
의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약이 없어요. 진주엔 그런 약이 없어요.”
“서울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기차 값은 있으세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엄마가 살려줄게. 네 숨은 내가 쉰다. 내가 살린다.”
사람이 절망에 다다를 때, 신은 침묵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인간은 움직인다.
분희는 그 밤, 신이 아닌 엄마의 발로 기적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이웃집을 전전하며 돈을 꾸기 시작했다.
팔 것도, 담보도 없었지만,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나중에 갚을게요. 이 애만 좀 살려야 해서요.”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고, 그 절박함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돈을 빌렸다.
진주시내에서 약을 가지고 있다는 병원으로 아이를 업고 갔다
의사는 주사 한 대를 들고 말했다.
“세 번의 기회뿐입니다. 세 번째에도 깨어나지 않으면… 아이는 못 삽니다.”
삶은 언제나 세 번의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태어나는 것, 버티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품에서 다시 깨어나는 것.
분희는 그 세 번째 기회를 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맡겼다.
첫 번째 주사를 맞았을 때, 아이의 숨이 잠시 고였다.
아직 디프테리아가 살아있다.
두 번째 주사를 맞았을 때, 눈동자가 잠시 떴다가 다시 감겼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지막입니다. 준비하세요.”
분희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손끝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아가야, 네가 엄마 품에서 태어난 게 운명이면,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와야지. 알겠제?”
세 번째 주사가 들어갔다.
방 안은 고요했고, 등잔불이 작게 떨렸다.
의사도, 간호사도, 숨을 죽였다.
죽음과 삶은 그때, 같은 공간에 있었다.
차이는 단지 ‘기다림’의 길이뿐이었다.
분희는 그 길목에서 아들의 숨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을까.
분희의 손끝에 미세한 온기가 닿았다.
아들의 입이 조금 열리더니, 작게,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공기 속으로 번지며 방안을 다시 채웠다.
“살았다… 내 아가 살아 있네.”
분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울었다.
그 울음은 병실의 벽을 타고 새벽까지 흘러내렸다.
그 시절, 한 아이의 생명은 의학의 승리가 아니라, 어머니의 지극정성이었다.
사랑은 논리로 증명되지 않았고, 오로지 절박함으로만 존재했다.
그녀는 그 절박함으로, 신의 자리를 대신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