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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초코파이 한입, 소주 한 모금

아부지

by 원성진 화가


경남 진주의 하늘은 늘 푸르렀다.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 만큼, 젊은 날의 어느 할 일 없는 오후처럼 투명했다.


정국은 그 하늘 아래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늘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가파른 언덕의 밑바닥, 사람들의 욕망이 미끄러져 내리는 자리. 그는 그 아래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충남 논산에서 군복을 입고 살던 시절이었다.

부대 앞 작은 점빵에 자주 들르던 그는, 계산해 주는 소녀 하나를 늘 훔쳐보았다. 이름은 분희. 열일곱이었다.


분희의 웃음은 유리병 속 사탕 같았다. 단단하면서도 달콤했다.

워낙 내성적인 정국은 그 웃음을 향해 나아가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바람이 왜 그 방향으로 부는지, 눈이 왜 특정한 얼굴을 오래 붙잡는지.
그저 그렇게, 둘은 사랑했다.
그들은 결혼했고, 진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정국은 오토바이를 탔다.
그 시절, 동네에서 오토바이는 부와 자유의 상징이었다. 엔진의 울림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젊음의 증거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울림은 도로 위에서 찢어졌다. 짧은 순간의 충돌, 차가운 아스팔트의 비명.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다.


그의 이동수단은 자전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자전거는 낡지 않았다. 쇠는 녹슬었지만, 그 바퀴는 여전히 돌았다.

삶은 그렇게. 멈추지 않고, 다만 느려졌을 뿐이다.


그는 자전거에 온갖 집수리 도구를 싣고 다녔다.
망치, 드라이버, 시멘트, 장도리, 낡은 공구상자. 삽자루까지.

그것들은 그의 손에 들리면, 세상의 부서진 조각들을 고치는 마법의 도구가 되었다. 지붕의 새는 빗물, 끊어진 보일러관, 겨울의 냉기. 그는 모든 균열을 메웠다.
다만, 자기 가슴속의 균열만은 손댈 수 없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을 고치는 기술을 가지지 못한 존재다.
그는 세상의 기계들을 고치며, 스스로의 결핍을 보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은 그에게 생존이었고, 동시에 구원에 대한 대체행위였다.


여름엔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렀고, 겨울엔 손가락이 얼었다.
자전거의 바퀴는 사계절을 네 번, 다섯 번, 열 번을 돌았다.
세월은 그에게 아무 대가도 주지 않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던 그는 고된 하루가 끝나면 실비집의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국물 냄새, 고등어구이의 짠 향,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그를 불렀지만,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그는 작은 슈퍼에서 초코파이 한 봉과 소주 한 병을 샀다.

초코파이 한입, 소주 한 모금. 그건 그의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위로였다.
값싼 술이었지만, 노동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비밀한 철학의 약이었다.
삶이란 결국, 고통의 강도를 조절하는 예술이니까.


밤이면 그는 조용히 손수첩을 정리했다. 오늘 일한 집, 내일 일할 집, 줄돈, 받을 돈........
자전거는 벽에 기대어 있었고, 바람은 천천히 커튼을 흔들었다.

분희는 늘 창고 겸,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녀의 손끝엔 언제나 삶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된장과, 연탄의 그을음, 그리고 사랑의 질감.


정국은 생각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분희와 결혼한 거야.”


그 문장은 한 세대의 요약이었다.
큰돈을 벌지도, 명예를 얻지도 못했지만, 그는 하나의 우주를 지켜냈다.
사랑이라는 미약한 중심에서 가족이라는 행성들을 돌게 한 사람.


이제 그의 자전거는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다.
페달은 녹슬고, 체인은 풀려나와 있다. 아니 이제 어디 있는지 찾을 수 도 없다.
하지만 바퀴 자국이 남긴 길은 아직 진주 골목 어딘가에 있다.


삶은 그렇게 흔적을 남긴다.
거창한 기념비로 남지 않고, 하루하루의 땀과 먼지 속에서, 소리 없이 돌아가는 바퀴의 원으로 남는다.


정국은 결국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그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형벌 속에서도 존엄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자전거는 신화의 수레바퀴가 아니지만, 그 위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버티고 있었다.


삶의 철학은 거창한 말속에 있지 않다.
그의 초코파이 한입, 소주 한 모금 속에 있었다. 그건 사랑을 위해 욕망을 접은 인간의, 가난하지만 찬란한 윤리였다.


진주의 바람은 여전히 그 골목을 지난다.
그리고 언젠가, 자전거 체인의 미세한 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다.

삶은 멈춘 듯 보여도, 항상 어딘가에서 천천히,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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