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사랑 : 프롤
프롤은 꽃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늘 자신이 먼저 길을 나선다.
야생화를 찾아.
존재는 기다림이 아니라 다가감에서 깨어난다.
그가 걷는 길은 '존재의 편지’를 받으러 가는 여정이었다.
야생화는 결코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침묵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곳으로 나아가 ‘나 또한 존재한다’고 조용히 대답하는 것뿐이다.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깨우는 응답이었다.
그의 발자국엔 늘 흙냄새가 묻어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 수십 번을 올랐던 산.
그 산은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고, 계절마다 다른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봄이면 얼음 밑에서 피어나는 현호색이 문득 문장을 바꿔놓았고, 여름이면 안갯속에 노루귀가 길을 잃은 듯 피었다.
그는 그 꽃들을 “이름을 가진 침묵”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붙은 순간, 존재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프롤은 그 이름보다, 이름 이전의 숨결에 주목했다.
현호색이 얼음 밑에서 스스로를 밀어 올릴 때, 그것은 ‘존재가 자신을 증명하는 최초의 몸짓’이었다.
그는 그 몸짓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결국 그 몸짓을 대신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임을 깨달았다.
백두산의 바람은 날카롭고, 한라산의 공기는 짠맛이 있었다.
무등산에서는 바위 틈새에 핀 병꽃나무를 만났고, 소백산에서는 흰 얼레지가 눈처럼 떨어졌다.
속리산의 계곡에서는 제비꽃이 그를 알아보듯 고개를 들어 보았다.
계룡산에서는 철쭉이 산을 덮을 만큼 피어 있었다.
그 앞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꽃의 침묵이 더 크고, 인간의 말은 그 앞에서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말은 존재를 가두지만, 침묵은 존재를 자유롭게 한다.
프롤이 산에서 배우는 건 언어 이전의 진실이었다.
꽃들은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에 있다.
그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야생화는 산의 마음이지.”
그가 종종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꽃이 예쁘다고 말하지만, 프롤은 꽃이 견디는 방식에 더 마음을 두었다.
비를 맞고, 바람에 시달리며, 뿌리를 바위에 박고 피어나는 그들의 고요한 투쟁.
그건 회화의 언어로는 다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붓 대신 발로 그렸다. 산을 걸으며, 흙 위에 자신의 궤적을 남기며.
존재는 고통 속에서만 자신을 의식한다.
꽃의 아름다움은 그 고통의 산물이다.
그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프롤은 ‘견딘다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그가 흙을 딛는 것은 생을 이해하려는 철학적 행위였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존재론적 문장처럼 쓰였다.
프롤에게 산은 오래된 기억의 지도였다.
어린 시절의 숨소리, 비 오는 날 젖은 흙의 냄새.
그는 그 모든 것을 산속의 꽃잎에서 다시 만났다.
야생화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가 찾은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존재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꽃은 인간의 거울이다. 자크라캉이 말한 거울이다.
그의 시선 속에서 피어난 것은 꽃이 아닌, 프롤 자신의 존재였다.
‘나는 본다, 고로 존재한다.’
그가 꽃을 본다는 것은 곧 그 꽃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 순간,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흐려졌다.
산은 늘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꽃들도 그를 위해 피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걸어간다.
“찾아간다는 건,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지.”
프롤은 그렇게 말하며, 또 한 번 등산화를 조여 맨다.
존중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는 산을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늘 자신이 작아지는 방식으로 자연 앞에 선다.
그 작아짐이야말로 존재의 진정한 확장이다.
자아가 줄어드는 만큼 세계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그렇게 프롤은 오늘도 산으로 향한다.
존재는 멈추면 사라진다.
그러나 걸으면, 그것은 다시 피어난다.
프롤의 여정은 결국 하나의 선언이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