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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을 사랑한 에필

붉은 마음 : 에필

by 원성진 화가

정원의 한가운데, 작은 연못이 있었다.

물빛은 바람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위로 겨울 남천이 가지 끝에 붉은 잎을 드리웠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물속에 비치며 반쯤은 현실이고, 반쯤은 꿈이었다.


에필은 남천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손에는 뜨거운 라떼 한 잔, 눈은 남천의 줄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 줄기는 가늘었지만, 그 안엔 오래된 결심이 있었다. 휘어지는 듯 보이지만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그런 생의 품격이 남천엔 있었다. 특히 여백의 미를 갖춘.


남천은 붉은 열매, 붉은 마음을 가진 나무다.

겨울이 와도 잎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히 불탄다. 바람이 차가울수록 그 붉음은 깊어지고, 눈이 내릴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그 잎은 마치 오래된 그리움의 편지 같았다. 한 장 한 장마다 스민 온도와 시간의 기억, 누군가의 따뜻한 손끝이 닿았다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천은 조용히 불을 키웠다.


에필은 그 붉음을 사랑했다.

그건 화려함 보다, 견딘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색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남천에 비추어 보았다. 세상은 잎을 떨어뜨리라 명령하지만, 어떤 존재들은 끝내 자신을 놓지 않는다. 그건 미련이라고 하기엔 뜨겁다.

자유의 결단이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던져진 자리에서 ‘어떻게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남천은 그 결단의 나무였다.

세상의 혹한 속에서도 자기의 색을 포기하지 않는, ‘본질보다 존재가 먼저’ 임을 증명하는 붉은 생명.


라떼는 식어가고, 햇살은 연못 위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에필은 생각했다.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限界狀況)’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자각하는 순간을 뜻한다.

남천은 바로 그 한계상황 속에 서 있는 나무였다.

추위와 죽음의 경계에서, 그 붉음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 그건 ‘초월을 향한 사유의 불꽃’이었다.


에필은 그 붉음을 보며, 자신 또한 그 경계 위에 서 있음을 느꼈다.

사랑과 상실, 기다림과 고독. 이 모든 감정의 총합이 결국 인간의 존재를 구성한다면, 남천 앞에서의 그녀는 하나의 ‘존재’로 깨어나고 있었다.


사랑도 결국 이런 모양이 아닐까.

한 번 불붙은 마음이 끝내 식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추위를 견디며 남는 것.


남천은 그렇게 겨울의 심장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색으로 숨 쉬는 존재. 붉고 고요하며, 다만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한 존재.


정원에는 여름 한철 태양과 겨루던 칸나가 남천 곁에서 조용히 말라가고, 남천은 곁에 섰다.

언제나 따뜻한 시선으로 섰다.

마치 에필의 마음이 남천 곁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듯. 사라지지 않는 붉음처럼, 그녀의 시간도 그곳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빛은 남천의 잎처럼 흔들리며 말한다.

“나는 잊히기 위해 붉게 남는다.”

그건 남천의 언어이자, 에필의 철학이었다.

존재의 불안 속에서도, 사랑의 불꽃으로 세계를 다시 밝히려는,

하나의 인간,

하나의 나무,

그리고 하나의 영혼이 남긴 입다문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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