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을 먼저 주는 추위
아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찬 공기가 얼굴을 확 덮쳤다.
그 순간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추위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살고 있던 것들의 그림자를 불러낸다. 금전의 걱정, 몸 어딘가의 미세한 통증, 계획해 둔 미래가 조금씩 뒤틀리는 감각들. 이 세 가지는 마치 서로 손을 잡고 한꺼번에 다가오는 듯했다.
젊을 때의 불안은 늘 양지바른 자리였다.
뭔가 할 수 있다는 확신, 지금 당장은 부족해도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있었다. 운세를 봐도 그렇다. 말년에 핀다고. (말년이면 죽기 전날인가?)
어쨌든 중년의 불안은 구조가 다르다.
가볍지 않고, 분명하게 형태를 지녔다.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듯, 삶도 어느 날 문득 내가 준비하지 않은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무언가가 사실은 이미 손가락 사이를 흘러나가고 있었다는 자각이다.
내부순환으로 진입하는 유턴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 근육이 약하게 조여들며 두근거리는 감각이 문득 불안을 더 키워냈다. 건강에 대해 예전만큼 자신이 없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작은 통증 하나가 과장되게 다가온다.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다고 해도 내 몸은 내가 더 잘 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매일 느껴지는 피로는 분명 몸이라는 집에서 하나둘씩 전구가 나가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자고 나면 새날이고, 자고 나면 새날이었다. 이제는 며칠씩 오래 남는다. ‘세월은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하고 말하는 날 볼 때면 묘하게 서늘한 기분이 든다.
금전의 불안도 나이와 함께 모양을 바꿨다.
젊었을 때는 돈이 부족해도 미래의 나를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갑의 무게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계산하는 일이 더 두렵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로또 밖에 없는가?
내가 가진 것, 내가 벌 수 있는 것,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서로 부딪히며 균형을 잃어버릴까 봐 마음속 저울이 매일 흔들린다.
계획은 세웠고, 노력도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은 예정된 도면을 어지럽힌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작은 비용까지 계산하며 내 삶의 구조물을 다시 튼튼하게 세워보려 애쓴다.
계획의 좌절은 또 다른 방식의 추위다.
나름 인생의 지도를 그리고, 갈 방향을 정했는데 어느 날 보니 지도의 몇 곳은 지워져 있었다. 나는 여전히 길을 가고 있지만, 그 길의 끝이 어디였는지 가끔 잊어버린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일도 예전처럼 가볍지 않다. 다만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은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며, 어느 순간 인생이 나를 한 번 더 성숙하게 밀어 올리는 방식이라는 걸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덜 떨리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 출근길의 이 추위 속에는 위로도 한점 섞여 있다.
찬바람이 옷깃을 젖히며 파고들 때는, 항상 오래 전의 따뜻한 기억들을 떠올랐다.
막내 이모가 없는 살림에 그 비싼 겨울 외투를 우리 4형제 모두 사주시며 단추를 하나씩 채워주던 손등, 집안 가득 차오르던 김치찌개 국물 냄새, 어린 나를 감싸던 이불의 무게. 그 시절의 온기는 지금도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작게 타오르고 있다. 그 온기를 느끼는 순간, 현재의 불안도 희미한 빛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위기감은, 자신을 다시 마주 보게 하는 큰 거울 같다.
그 거울 앞에서 나는 매일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이어 붙인다. 불안은 여전히 나를 따라오지만, 그 불안이 나를 깨어 있게 한다는 사실도 피할 수 없다. 하루를 버티기 위한 내 작은 의식들. 점퍼 자크를 끝까지 끌어올리는 손끝, 뜨거운 믹스커피에 마음을 고르는 순간들이 조용히 삶을 지탱해 준다.
강변북로로 접어들면서 히트가 따뜻해졌다. 차량의 속도가 올라가고, 차 안도 제 온도를 찾아갔다. 운전석 온열시트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결린 등과 허리가 얼마나 시원한지.
내 안의 불안은 차량과 같이 출렁였지만, 그 출렁임이 나를 깊게 숨 쉬게 하고, 더 멀리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 또한 생각한다.
추위는 여전히 무섭다.
그래도 그 차가움 속에서 나는 앞으로의 날들을 더 조심스럽게, 더 성실하게 살아갈 공기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이 계절을 건너는 일이 완벽하진 않겠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년이 주는 가장 묵직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혹여나, 칠순 노모께서 이 글을 읽고 걱정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너무 걱정 마세요. 다 이렇게 삽니다.
(그래서 조용한 새벽에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