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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구조 속을 떠다니는 사람

수필 : 내가 하는 일

by 원성진 화가

2025년 여의도는 여전히 빛난다.


유리 빌딩의 표면은 하늘을 반사하며 스스로를 복제하고,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나는 그 빛의 반사 속에 나의 얼굴을 본다.

여의도는 늘 거대한 구조물처럼 느껴진다.

그곳엔 금융의 질서가 있고,

정보의 흐름이 있고,

인간의 언어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데이터가 있다.


대학원에서 VRAR 콘텐츠를 전공하며,

구조와 감각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동시에 VR 드로잉으로 나만의 공간을 그린다.


오늘도 한강 자전거길 위에서 잠시 자전거를 세운다.

여의도의 빌딩 숲이 강건너편에서 반짝인다.

그곳은 늘 내 VR 속 구조물과 닮았다.

투명하고, 복잡하며,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아름다움.

나는 핸들에 팔을 걸고 휴대폰에 메모를 연다.


이 수필은 그렇게, 여의도를 바라보며 한강변의 바람 속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현실의 도시를 보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그곳을 VR 공간처럼 느낀다.

유리의 벽은 가상처럼 빛을 반사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데이터의 패턴처럼 반복된다.

VR 드로잉을 할 때와 다를 바 없다.

HMD를 쓰고 빛의 선을 그릴 때마다,

이 도시의 구조를 다시 그리는 기분이 든다.

인간의 손끝으로 그린 선이 어느새 나를 가두는 선이 된다.


VR 속에서 느낀 감각과 철학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어렵지만, 동시에 필연적이다.

그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구조의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서 글을 쓰는 또 하나의 기호인가?’

대답은 모호하다.

글을 쓴다는 행위조차 구조 안의 질서에 포함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나는 계속 쓴다.


VR 드로잉 속에서 나는 빛의 선을 긋는다.

그 선들은 곧 벽이 되고, 벽은 구조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구조가 나를 집어삼킨다.

나는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피조물이 된다.

내가 만든 세계가 나를 다시 쓰는 것이다.


자전거에 다시 올라 한강을 따라 천천히 달린다.

강물 위로 반사된 빛이 수면에 흔들린다.

그 반사된 여의도는 현실보다 더 ‘가상’처럼 보인다.

VR에서처럼, 현실의 여의도 또한 끝없이 반사되고, 복제되고, 겹쳐진다.

모든 것은 기호로, 모든 기호는 다시 기호를 낳는다.


나는 페달을 밟으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나는 지금 현실 속을 달리는가, 아니면 구조 속을 떠다니는가?’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그 감각이 잠시 나를 붙잡는다.

그러나 곧 그것마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사라진다.


벽과 선, 그리고 파편화된 빛의 구조들. 그것은 이 도시의 초상이다.

현대인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소유’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성하는 질서의 일부로 살아간다.

VR 속에서, 나는 그것을 형상으로 경험한다.


밤이 내리고, 강 위로 불빛들이 수면 위에 거미줄처럼 얽힌다.

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물 위에 비친 여의도의 그림자를 본다.

그 반사면 속에서 나는 나의 그림자와 구조의 그림자가 겹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고, 동시에 불안하다.


내가 VR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공간’이자,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호의 틀 안에 포획된 존재로서, 나는 나를 그리며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은 곧 또 다른 방식의 존재다.


나는 브런치에 이 글의 초고를 저장하고, 휴대폰을 닫는다.


한강의 바람이 불어오고, 여의도의 불빛이 물 위에서 반짝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강변인가, 가상의 구조인가?

나는 구조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구조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 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도시의 소음이 다시 밀려온다.


나는 페달을 밟으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의 구조 속을 떠다니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나는 조금 더 가벼워진다.


사라지는 선이 되어,

존재를 그리는 일은 여전히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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