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와 자가격리는 1번으로 충분한 듯하다.
'4월 2일 0시' 대만에서 자가 격리가 끝나던 순간. 20년 전 새천년을 맞이하며 환호하던 어린 시절 그때의 나처럼 신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걸어서 1분 아니 불과 뛰어서 몇 걸음이면 도착할 수 있는 7 - 11에 들어가서 기분도 낼 겸 콜라를 하나 산 후에 터벅터벅 20분 정도를 걸은 후에 다리가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 닫고 돌아와 자유를 꿈꾸며 잠이 들었다.
4월 8일 대만에서 마지막 점심을 삼미 식당에서 해결한 후.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약 5년 6개월의 대만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다. 한국 해외 출입자 의무 격리 규정에 따른 두 번째 자가격리가 시작된 것이다.
3월 17일 코로나에 철저하게 대응해오던 대만 위생부가 미국발, 유럽발 확진자가 하루 최대 10명까지 발생하자 당일 오후 4시 이후 모든 입국자는 자가 격리 대상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나는 미얀마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후에 방콕에서 환승을 준비 중이었다. 나는 조금 일찍 들어갈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자가 격리자 대상에 포함이 되었다. 입국일 다음날을 기준으로 했기에 18일 아침에 도착한 나는 19일부터 공식 자가 격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4월 1일 밤 12시 즉, 4월 2일 0시가 되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전까지는 외출은 물론이고 출국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한정된 공간에서 옴짝 달싹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디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14일이라는 시간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독서, 중국어 공부, 글쓰기, 집 운동 등등.
그런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현실은 늘어지는 잠 잠 잠! 영화 한 편 시청, 유튜브 시청이었다. 글쓰기는 한편도 제대로 써 내지 못 했다. 집중력이 산만해진 탓이다. 결과적으로 현실적으로는 이상적인 14일을 보내지 못했다. 독서의 경우는 하루에 5시간 이상을 넘어가니 집중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사색 없이 그냥 읊조리는 독서는 껍데기만 독서일 뿐 독서로 인해 얻는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면서 즐거워했다는 이야기가 떠 올랐다. 나는 이 상황을 즐기지는 못 하더라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곰처럼 실컷 먹고 잠을 몰아서 자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곰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수면 시간을 최대 10시간이라고 가정하더라도 14시간 동안은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쉬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열심히 한 후에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뿐이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국가 대만이었지만 자가 격리 시간 동안 그것도 5년 넘는 생활의 마지막에 예상치 못 했던 14일은 고독하다면 고독했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아무래도 정신 상태에 문제가 올 거 같아서 나는 나보다 더 수천 배는 더 고독했을 '영화 빠삐용(몇 년간 독방 생활을 버티고 살아나 온 삶의 의지에 감탄했던) 주인공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시간을 견디어 내었다. 14일간의 자가 격리 생활을 압축해서 적자면 그러하다.
14일의 자가 격리. 끝난 시점에서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밀려오는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감도 밀려왔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 낫을 뿐이다. 약 일주일 정도 대만에서 휴식을 가진 후에 한국으로 가야 했고 한국에서는 그렇다. 후반전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전반전은 원정이었다면 후반전은 홈 그라운드' 즉 나의 고향에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만을 떠나기 전 내게 주어진 약 1주일의 시간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 달 사이에 한국행 비행기만 어느덧 4번째 재발권이었기 때문이다. 재발권과 취소가 반복되는 사이에 고향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김해 공항은 닫혀 버렸고 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는 고향집과 끝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이 유일했다. 달리 방법은 없었다. 항공권 가격은 오르고 있었지만 더 걱정인 것은 이 마저도 취소될까 봐 걱정이었다.
이미 대만에서 지낼 집도 다 빼고 짐도 한국으로 다 보내버린 상황에서 기가 막히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니 정확히는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계획에 없던 후반전까지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내가 대만을 탈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만 생활을 정리하기로 한 것은 작년 10월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만은 한국행을 선택해야 할 만큼 위험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전한 곳이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나는 더 위험 구역으로 가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저 지난 몇 개월간 준비했던 일들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한국이 4월 1일 이후 입국자에 한해서 의무 격리를 실시한다는 소식에 들리자마자 대만에서 한국으로 가고자 했던 사람들은 3월 31일 이전에 거의 다 떠나 버렸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4월 2일부터 출국이 가능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혼자 비행기를 타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 보았다. 실제로 4월 1일 대만발 한국행 비행기는 승객 대신 화물만 가득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심 1인 승객을 기대해 봤지만 이외로 승객은 10명 가까이 되었다. 그 와중에 서양인으로 보이는 외국인도 있었는데 빈자리가 많아서인지 좌석을 2번이나 변경하다가 승무원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국가 간 이동이어서였을까? 승객들도 거의 없었기에 기내에서 큰 긴장감은 없었다. 기내에서는 승객수만큼이나 많은 승무원들이 기내식 대신 간식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게 그날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말이다.
영화 한 편을 다 볼 여유도 주지 않은 채. 상공을 가르던 비행기는 약 오후 6시경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부산 집에 도착 했을 때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대만에서 한국으로 오는 시간보다 긴 시간이었다. 오후 약 4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약 10시간 가까이 제대로 된 물도 에너지 섭취도 없는 상태로 드디어 고향 집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부산 까지라는 주제로 8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싶지만 그로 인해 글 전체가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논란(입국자의 한마디가 마치 매국노의 투정처럼 들릴까 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기서는 생략하려고 한다.
자가 격리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이 있을까?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않고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규정 면에서 두 나라 간 큰 차이는 없었다. 한국이 조금은 불필요하게 더 복잡한 정도?라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홈 그라운드에서 시작된 후반전은 할만했다. TV를 볼 수 있었고 주방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 창문도 많아서 심리적으로도 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뉴스를 보니 다양한 자가 격리 사례들이 있었는데 뉴스에서 보여주는 철두철미한 자가 격리 사례는 이미 대만에서 자가 격리를 경험한 이후로 저렇게 했다가는 내 정신까지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사회적 문제는 만들지 않겠다는 자세로 자가 격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첫날부터 말이다. 한국으로 귀국 후에 이전에 한국에서 사용했던 한국 번호 정지 해제 요청을 하였는데 통신사에서 나의 번호가 완전 해지되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동의도 없이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에서 휴대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신규 가입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신규 가입의 경우는 대리점 직접 방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통신사의 규정이었다.
한마디로 인터넷 사용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루에 2번씩 증상 여부를 어플로 전송해야 하는데 인터넷이 안 되는 문제가 발생을 했다. 대만에서 사용하던 휴대폰은 국제 전화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집 전화?를 사용하라고 한다. 아참, 나는 집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몇 년 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집 전화는 없는 줄 알았는데 아파트 내부에 설치된 인터폰이 집전화 역할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하긴 지난 5년 넘게 이 곳에서 지낸 시간이라고는 다 합쳐봐야 한 달도 안 될 터이니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내게 배정된 담당 공무원 연락처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항에서 받은 긴급 연락처로 전화를 했으나 두 분의 주무관은 전부 전화를 받으시지 않으셔서 무작정 1339에 전화 연결을 하였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변이었다. (1339번에서는 갑작스러운 코로나 증상이 나타날 경우 대응을 하는 것 같았다)
1339번 연결자가 알려준 대로 이번에는 114를 통해서 해당 구역 보건소에 연락을 하였는데 두 번째 답변은 나를 더욱 힘 빠지게 만들었다.
아직 나에 대한 어떤 자료(부산역에 내려서 코로나 검사 및 개인 정보 기록 등을 한다)도 전달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밖으로 나가도 방역 당국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드디어 내게도 담당 공무원이 배정이 되었고 오전과 오후 1번씩 확인 전화가 왔다. (물론 집 전화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관할 보건소 재량으로 외출을 허락해주어서 휴대폰을 새롭게 개통하고 오고 싶었지만 허가를 내 줄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아니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복잡한 서류 절차를 준비해서 대리인이 신규 가입을 신청하거나 아니면 자가 격리가 끝날 때까지 인터넷이 없는 상태로 지내던가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답이 없는 하루가 또 흘러갔다.
그래도 오후에 도착한 긴급 구호 물품은 생각 이상으로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길에 추가로 물품을 지원해 주셨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냉장고에 있는 것만 열심히 먹어도 충분할 듯하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개통이 완료되었다. 그렇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전자를 택한 것이다. 아니 전자를 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한국을 들어오면서 제일 기대했던 배달 어플 한번 사용해 보지 못하고 음식 주문을 집전화로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 전화번호를 찾은 후에나 가능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누군가까지 불편해지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불편함을 누군가에게 떠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딱 한 번만 대리인을 고생시키기로 했다. 덕분에 나의 삶은 윤택해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쓰게 되었다. 다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종을 선택했다는 점? 그 정확히는 노트1 0 구매를 계획했고 추천으로 노트1 0+를 구매했다. 참고로 이전에는 노트 3을 7년째 사용 중이었다. (혹시나 이 글을 보고 계신 대리인 분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그리고 꽤심죄를 적용해서 S사 대신 L사로 소위 갈아타기도 했다.
약 4일 정도 인터넷 없이 집에서만 있어야 했는데 그래도 유일한 낙은 먹는 것이었다. 대만에서는 14일간 먹은 음식의 80%가 대만 컵라면이었는데 그래도 이 곳에서는 끓인 라면을 먹을 수 있었고 밤 12시에도 치킨을 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인터넷으로 마트 물건을 구매해보기도 했다.
<신기했다. 가까운 수퍼 가면 다 있는데 이걸 더 먼 곳에서 배송을 해준다>
입국할 때만 해도 체념하고 있었던 투표를 '증상이 없는 자가 격리자'에 한해서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선보다 중요한 것이 총선이라고 외치던 나에게 생애 20번 남짓 찾아오는 권리를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는데 비록 지금은 총 4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하지만 늘 행운의 여신은 내 곁에서 날 지켜보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가 격리자의 외출 문제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더라도 위험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투표 전 기존 담당 공무원 이외에도 선관위, 보건소 등등 참 다양한 곳에서 전화가 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오는데 다들 자기소개가 너무 길어서 마지막 소개 단어를 들을 때는 맨 처음에 했던 말을 까먹을 정도였다. 다들 하는 말들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나올 때 마스크 꼭 하고 나오세요'
그리고 담당 공무원에게 출발할 때, 투표 대기할 때, 끝나고 복귀할 때 '총 3번'을 문자로 보고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맞이하는 바깥공기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동안 벽 하나 사이로 이 녀석을 멀리 했단 말인가? 그 반가움이 평소보다 더 반가워서 천천히 걸었음에도 투표 장소는 금방 도착하고 말았다.
자가 격리자 투표 대기자는 나를 포함해 총 2명이었다. 나 빼고 한분은 중년의 아저씨였는데 자가 격리 며칠 차세요? 어디에서 오신 거예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 걸면 안 될 거 같은 에너지를 내뿜으셔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는데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오후 6시. 공식 투표가 끝난 후 우리는 밖에 따로 마련된 기표소에서 투표를 마감한 후에 내 뒤에 보이는 직원들에게 투표 봉투를 건넷는데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는 방호복으로 다 가려서 보이는 거라곤 안경과 구두밖에 없는 (아마도 학교 내 공익 요원이 아닐까?) 분을 부르시더니 결국 그분이 받아가셨다. 나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왠지 자가 격리자로서 겪는 섭섭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오해일 수도 있고 오해가 아니더라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것이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걸어왔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해서 아까보다 조금은 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는 만큼 바깥공기를 한번 더 마실 수 있었다.
금세 다다른 아파트 입구. 1주일 사이에 약해져 버린 나의 다리를 위해서 계단으로 집까지 올라왔다.
아참, 집에 도착한 지 30분 정도 지난 후에 담당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다소 늦은 시간에 확인 전화가 왔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이미 어플로 증상 보고를 다 했기에 전화는 사실살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어제 투표 이후에 하셨던 이야기를 다시 하셨다. 다른 게 아니고 나의 위치 추적이 전혀 안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투표를 위해서 이동할 때 위치 추적기가 나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나 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의 현재 위치가 기존 주소지에서 약간 벗어난 상태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응? 이거 뭔 소리야?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정리를 하자면 나는 한국 입국 당시 대만에서 사용하는 휴대폰에 '자가격리 어플'을 설치한 후에 입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거를 하기 위해 외출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집 밖을 나갈 일이 없었으니 위치 추적기에 움직임 또한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선거로 인한 이동 때문에 위치 추적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시스템에 문제일 수도 있고 휴대폰의 문제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대만에서 사용하던 외국 번호는 인식을 못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안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