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와 월세 사이 & 자존심과 자존감 사이.
2014년 그러니까 벌써 11년 전일이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에서 해외 지점을 개설하기 위해서 점포 개발업무를 맡았을 때였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한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에도 전세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방문했던 국가들은 그러했고,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한국 본사에 이해시키기 위해서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무심코 넘겼던 '전세 문화'가 최근 국내에서 다시금 다뤄지게 되면서, 나 또한 외국에서는 한국의 전세라는 문화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볼지 궁금한 마음에 확인을 해 보니 아래와 같이 답변을 받았다.
영어권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들이 알파벳으로 Jeonse라고 음차 표시를 해둔 것은, 딱히 전세라는 의미를 표현할 그들의 단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문화적 가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현실적인 시선은 어떨까? 물론 나의 사견이 절대적일 입장이 될 순 없지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일개 시민으로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월세는 여전히 '돈낭비'라는 인식과, '전세 선호 현상'이 지배적인 듯하다.
이에 대한 이유를 조심스레 추측해 보자면 전세는 적어도 "현금을 융통할 수 있는, 일종의 지표처럼 여겨지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특히 남녀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세 자금 융통은 내 집 마련을 위한 기초 자금이자, '집안간 재무제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훗 날 내 집 마련의 첫걸음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반해 월세는 수입이 불안정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뭐 이런 거다. "얘는 돈이 없나? 이 나이까지 돈 안 모아두고 뭐 했나?" 등)
이런 사회적 인식 이면에는 드라마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지금이야 오징어 게임처럼 콘텐츠가 다양해졌지만, 이 전 드라마의 단골 설정은 '6남매의 단칸방 월세살이, 사업에 실패한 부모님과 떨어져 사글세도 겨우 내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형제 등..' 월세는 곧 가난이라는 이미지로 직결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도 나도 해외여행 한 번쯤은 다녀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마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인 서울 대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근거 없는 위로'를 받았을 때, 혹은 월세를 산다고 말했을 때, '결례되는 질문을 했다는 뉘앙스' 혹은 '동정심' 등 시대는 바뀌었지만 "월세에 이미지는 여전히 90년대 드라마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주거 형태의 순위를 매기자면 1순위는 당연하게도 모든 서민들의 꿈 '자가!' 일 것이다. 그리고 '전세 - 월세 - 사글세' 순일 것이다. (참고로, 사글세는 나도 정확히 몰라서 찾아보니 보증금 없이 월세만 다달이 내는 개념이라고 하며, 현재는 거의 사라지고 쪽방촌 정도가 남아 있는 형국이다)
어쩌면, 주거 형태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계급 차별' 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주거 형태를 갖추고 있느냐? 에 따라서 '사회적 계층'이 결정되는 등 보이지 않는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가까이 아파트만 보더라도 '자가와 전세', '층수와 평수', '수도권과 지방' 더 나아가 임대 아파트까지.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인도 카스트 제도의 경우를 보면 크게 4단계로 분류되는데, 상위 2개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는 나름대로 귀족'이라면, 하위 2개 '바이샤와 수드라'는 노동자 계급으로 분류한다. 물론 이 축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라는 존재도 있다.
덧붙이자면 불가촉천민은 보통의 사람들과 신체적 접촉도 불가능한데, 이를 한국이라는 배경으로 옮기면 "노숙자들을, 그런 존재 혹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불가촉천민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신분이 정해졌다는 점에서 조금 다를 뿐.
하지만 그런 한국에도 전세를 기피하게 된 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수천 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전세 사기였다. 이런 일은 늘 남의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서울에서 살다 보니 가까이는 직장 후배가 그 뉴스의 사연자였다. 이쯤 되면 정말, 국가 재난이 따로 없다.
그러나 늘 그래 왔듯이 사회는 고통과 희생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변화하곤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최근에는 전세보다 월세 비중이 앞질렀다고 한다. 물론 집주인들이 현금을 선호하는 기조와, 가파르게 상승 한 대출 금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제 이전보다 조금은 당당하게 말하곤 한다.
"저, 월세 살아요. 전세는 위험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