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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완짹슨 Feb 15. 2021

아버지, 저도 '삐삐' 사주세요.

- 지금은 필요 없지만 그때는 간절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당시 대한민국에 IMF가 터지는 바람에 봄에 계획되었던 수학여행이 뒤늦게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인근 여학교와 일정이 겹치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당시 수학여행 코스라는 게 뻔했기에 중간중간 휴게소 혹은 유적지 같은 곳에서 여학교와 동선이 겹치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일부 친구들은 휘파람을 불며 난리 브루스였고 선생님들은 그런 우리들을 평소보다 엄격하게 우리를 감시하면서 큰 사고 없이 여행은 끝이 낫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정신없이 사진만 찍고 이동했던 유적지들보다 나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때도 젊으신 분이셨지만 대학생 때는 소위 좀 날리셨을 것 같은 수려한 외모와 훤칠한 키의 소유자였던 선생님은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에 우리 반만 몰래 불러 내서 직접 가져오신 샴페인을 맛이라도 보라며 작은 종이컵에 조금씩 따라 주셨는데. (왠지 선생님도 학생 때 그런 선생님을 만나셨나 보다)   


내 눈에 멋쟁이 선생님의 일탈? 은 그다음 날 마지막 유적지 방문에서 정점을 찍었었다. 그때가 마지막 일정이라 그런지 비교적 여유로운 자유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때 선생님은 우리는 버려둔 채? 또다시 동선이 겹친 인근 여학교 몇몇 학생들과 '하하 호호'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갑자기 손짓으로 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부르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냅다 뛰었는데 내가 도착함과 동시에 여학생 일행들이 그중 한 명을 내 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우리반 학생 한명을 소개시켜주기로 모종의 합의(그래서 하하 호호 분위기가 좋았나 보다)를 했던 것이었고 때마침 내가 눈에 띈 것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우리 반 제일 순둥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20년도 더 지나버버려서 세상의 '단물' , '짠물', '쓴 물' 다 마셔본 내가 지금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선생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어쨌든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 한 기회? 가 찾아왔고 본의 아니게 주변의 시선까지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말 그대로 순둥이 숙맥이었기에 선생님의 의도와 다르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쭈뼛 쭈뼛 서 있다가 누군가 찍어주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고 다시 돌아왔는데 잠시 후 선생님이 내게 사랑의 꿀밤을 먹이면서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쪽지를 펼쳐보니 사진을 같이 찍었던 여학생의 '이름' '삐삐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린 마음에도 '기쁨과 부끄러움 그리고 걱정' 이 동시에 밀려왔다. 선생님의 깊은 배려에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선생님이 연락처를 물어봐서 쪽지를 전달해 줄 정도로 숙맥이었던 당시 상황 속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후가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삐삐가 없었으니까'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그래도 내게는 당시 현장을 지켜봤던 친구들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반 친구들은 공중전화로 쪽지에 적힌 번호로 음성을 남기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렇게 시작된 연락으로 어찌어찌 또 약속까지 잡았다. 그렇게 약속 당일 정장까지 빌려 입고 생애 첫 이성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그 여학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이후로 자신감을 충전한 것은 큰 소득이었고 그 이후로 이성을 대하는 태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도 삐삐가 갖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삐삐를 갖지 못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휴대폰이 대중화 되면서 '삐삐'는 그저 그 시절을 함께 했던 기억들만 남아 있다. 


그때는 엄격했던 아버지가 무서워 필요하다고 말을 하지 못 했고, 지금은 필요는 없지만 말은 할 수 있다.

                       "아버지, 저도 '삐삐'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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