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먹자.
지금은 폐지된 개그 콘서트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에 방영되었던 프로그램 '대화가 필요해'는 재미도 재미지만 그 시대상을 참 잘 그려낸 개그를 넘어 희극인들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봤던만큼 동시에 씁쓸했던 기억도 남아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우리 부자 이야기' 같아서이다.
우리 부자는 정말 대화가 없는 편이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없다. (이렇게 독백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조용한 사람인지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주변 사람들이 제일 걱정했던 것이 훈련이 아니라 '너 졸병 때 말 못 해서 어떡하냐?' 였을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회사에 입사해서도 '삼성전자 노홍철(참고로 본 회사는 나랑 상관없다)' 같은 수식어가 있을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갈까? 그에 반해 나의 아버지는 나처럼 보기 드문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말씀 자체는 많으신 편이다. (남들 앞에서만)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대화가 많았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기억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래 왔던 것이다.
특히나 내가 유아 시절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셨는데 군인 특유의 습관이 몸에 베여서 그런지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나는 불과 9살에서 10살이 되던 해에 약간의 잘못이라도 하면 군인들이 받을법한 벌을 받았다. 아직은 잘못하면 혼나기보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먼저 배우는 사회성을 더 키워야 할 나이에 어린아이에게 육체적인 체벌은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대화가 없어진 것이.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나의 하루하루는 반항기로 가득했지만 해소할 곳은 없었다. 해소해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었는데 그 반항기의 절반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 사항이 많아지게 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항기 섞인 철없는 사춘기 소년의 대화법은 비속어만 없을 뿐. 대화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수준이었다. 속된 말로 아버지를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을 하는 철없는 아이 같았다.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만큼의 요구를 제공받지도 못 하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중재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다행히 중재인은 구세주 역할까지 자청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 했다. 그나마 중재인 덕분에 나는 사춘기에 쌓인 마음의 분노를 밖으로 토해낼 수 있었고 그래서였을까? 뉴스에 나올 정도로 비행 청소년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공부만 못 했을 뿐.
반항기 가득하던 사춘기 소년은 이제 몇 년이 지나면 불혹이 된다.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았던 20대를 지나 30대가 되면서 또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이나마, 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아버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말이다. 지난 20년간 우리 부자가 나눈 대화 내용은 중복되는 인사를 제외하면, 친한 친구들과 단톡 방에서 하루 동안 나눈 이야기보다 적겠지만 그 말은 이제 채워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 미래를 예단할 수는 없겠지만 조심스레 추측은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때는 대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지 않을까?라는 추측 말이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다시 대화를 하려고 한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말하는 요구 사항 말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부자들의 진짜 대화(對話)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