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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완짹슨 Feb 19. 2021

학교 축제 때 '가요제'를 나가야만 했던 사연.

- 생존을 위해 무대에 오르다.

2006년 4월 19일. 24개월간의 의무복무를 끝내고 드디어 민간인이 되던 날. 

아버지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 이제 휴대폰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하나 사 주시겠지?라는 기대감과 함께)


평소 엄격한 아버지를 잘 알기에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는 오늘이 이야기 하기에 적절했다. 

아들의 전역만큼 기쁜 일? 이 또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인 내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다.


     "이제 그 정도는 니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 

                    그리고 앞으로 휴대폰 요금도 네가 직접 내도록 하여라"



그때 내 나이가 겨우 23살이었다. 서류상으로 어른이기는 했지만 아직 학생 신분이었고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 사는 중이었다. 완전한 독립 상태는 아니었다. 휴대폰도 휴대폰이지만 매달 통신 요금을 어떻게 하지? 포기하면 걱정이 사라지겠지만 지난 24개월간 공중전화 '1677 콜랙트 콜'의 단골손님이었던 나에게 휴대폰은 간절함 그 자체였다. 


결국 나는 스스로 휴대폰을 개통했다. 요금도 직접 내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복학 전까지는 건설 현장에서 돈도 좀 모은 덕에 당장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9월에 복학 이후였다. 당시 1주일에 내가 받았던 용돈은 5만 원이었는데 그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아침, 점심, 저녁까지 학교 식당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휴대폰 요금까지 내면 도저히 생활이 불가했다. 



- 결국 휴대폰은 연체로 인해 정지되었다 -

복학 이후 빠듯한 살림살이에 결국 요금이 연체가 되었고, 통신사는 미련 없이 내 휴대폰을 정지시켜 버렸다. 

물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리는 없었다. (아버지랑 살갑게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 휴대폰이 정지되니 모든 생활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당시 전공 동아리와 총대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이 없으면 생활 곳곳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친구야, 내가 정말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내가 휴대폰 요금을 못 내서 20만 원만 빌릴 수 있을까?"

다행히 친구는 나의 상황을 이해하고 흔쾌히 20만 원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정지된 휴대폰은 다시 개통이 되었지만 문제는 친구에게 빌린 20만 원을 빨리 마련해야만 했다. (내 한 달 생활비)


--

- 휴대폰 요금을 벌기 위해서 신청하게 된 가요제 - 

어떻게 20만 원을 마련할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학교 축제 포스터 한 장! 여기서 내 눈에 든 것이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가요제였는데 딱 보고 이거다! 싶었다. 노래를 잘할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1등 상금 50만 원이라는 문구에 신청부터 마쳤다. 



- 예선 당일 - 

당시 학교 축제는 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은 분위기였는데 예선 참가자만 약 60여 팀이었다. (어마 어마 하구나) 여기서 8팀만이 축제 당일에 노래를 할 수 있고 그 8팀 중에서도 최소 3등 안에는 들어야 상금을 받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걱정보다는 오늘 어떻게 살아남을지만 고민했다. 나에게 노래를 잘하고 못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순위 안에 들어야 했다. 


나의 예선전 선곡은 '플라워의 goodbye'라는 발라드 곡이었는데 정말 잘하지 않는 이상 감동을 줄 수 없는 노래였다. (사실 이 노래를 선곡한 것은 당시에 가사를 안 보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몇 안 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참가자 중 나의 차례가 시작되었다. 무대 위에 서 있으니 예선 참가자만 60팀에 같이 따라온 친구 등등. 관객석이 꽉 들어찬 것이 느껴졌다. 애써 긴장하지 않고 나는 분위기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나 반응은 없었는데 (없을 수밖에) 제일 괜찮은 반응은 중간에 소위 말하는 삑사리가 낫을 때였다. 관객들은 이외로 그 상황을 즐거워했다. 이렇게 2절을 마치면 나는 답이 없을 듯해서 나는 그 삑사리를 기회 삼기로 했다. 


반주가 흐르는 동안 나는 멀뚱히 서 있지 않고 관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노래를 잘 못 하는데 간절한 이유로 가요제에 참석했습니다. 2절은 최대한 웃기게! 라도 불러 보겠습니다. 박수 한 번만 주십시오 ~ "라고 말을 끝낸 후, 나는 곧바로 심사위원 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심사위원 석에 놓인 음료수를 허락도 없이 따른 후에(노래는 계속하면서) 그것을 들고 관객석으로 향했다. '마실 듯 말 듯 누군가에게 줄 듯 말 듯' 하다가 때마침 내 시야에 들어왔던 이쁜 여성분에게 그것을 프러포즈 반지를 주는 남자 친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즉석에서 시도했다. 동시에 노래 가사도 현장 상황에 어울리게 맞아 들었고 다소 지루해질 뻔한 예선전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노래는 내려놓기 시작했다. 


결국 노래가 끝날 무렵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내려왔다. 그 순간에는 결과와 상관없이 충분히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 예선 합격! 단 본선 진출을 위한 단 하나의 조건 - 

무대에서 반응이 좋기는 했지만 나의 돌발행동 때문에 밉보이지 않았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연락을 기다렸는데 축하한다며 합격 전화가 왔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본선에서는 꼭 신나는 노래를 불러야 할 것' 즉, 선곡을 다시 하라는 제안이었다. 주최 측에서 이렇게 먼저 제안을 해 주니 나도 마음 편하게 곡을 새롭게 정할 수 있었다. 

 

- 윤도현의 '타잔'으로 승부를 걸다. 

당시 hot했던 '강진의 땡벌'부터 여러 후보군을 놓고 고민하다가 다소 생소할 수 있었지만 나의 발성이나 캐릭터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윤도현의 타잔'을 선택했다. 그리고 노래 제목에 어울리게 의상도 준비를 했다. 게다가 축제 당일 주최 측에서는 뽀글이 가발을 쓰라며 주었고, 오프닝 공연을 왔던 부산에서 이름 좀 날리는 '메리트 댄스팀' 이 같이 춤까지 춰 주면서 나는 그날 무대를 휩쓸어 버렸다. 나도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최종 순위는 2등!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가요제에서 가창력이 아닌 오로지 쇼맨쉽으로 2등을 한 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2등 상금은 정확히 20만 원이었다. (휴, 빌린 돈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https://youtu.be/vBUYhMn-DyY


<당시 누군가가 찍어준 영상을 싸이월드에 올렸고, 원본이 없어서 컴퓨터 화면을 다시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렸다>

그날 밤 나는 '타잔 그 자체로 빙의를 했었다'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작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 뒤늦게 알게 된 사실 '아버지는 동생의 휴대폰 요금을 내주고 있었다' - 

무서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나였지만 그래도 죽을 각오로 목소리를 높이며 대화?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 그날이었다. 나에게는 전역하던 날 휴대폰 요금도 직접 해결하라고 하시더니 동생은 대신 내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심하게 격분했다. 게다가 고지서를 보니까 요금이 10만 원이 넘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유료 결재 하나 마음대로 못 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의 이유를 내세웠지만 화가 난 나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떤 이유와 논리로도 이 불공평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밀린 휴대폰 요금을 내기 위해서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돈을 빌린 일이며, 다시 그 돈을 갚기 위해서 학교 축제 가요제에 나간 일들을 아버지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고 계신다. 지금이야 추억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때는 "전역하면 효도하겠다.라는 마음가짐이 또다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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