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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기획 Mar 05. 2020

제96화: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처음’을 선물해 보자

위기의 꼰대 구출작전, 꼰대탈출 넘버원


친한 형과 장거리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길이 무료했는지, 갑자기 형이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사랑 이야기인지라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너무 실감하게 얘기하는 탓에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왠지 ‘첫’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매력에 끌려 한 시간 가량 형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인생의 ‘처음’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역시 첫사랑 생각이었지만, 이 글을 와이프도 보고 있다는 위기감에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


사람에게 있어 ‘처음’은 언제나 설렘으로 다가오고, 시간이 지나도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첫사랑, 첫 키스와 같은 사랑 감정뿐만이 아니라 첫 직장, 첫 월급, 첫 출장 등의 기억은 언제나 가슴속에 추억으로 자리하게 마련이다. 오늘은 그 ‘처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 첫 직장은 한국능률협회였다. 지금은 KMA(Korea Management Association)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하지만, 왠지 협회라는 이름과 이미지가 더 잘 어울리는 곳이다. 국내 최고의 전통 있는 교육 기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수적인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첫 직장으로 한국능률협회를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내 인생 첫 팀장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한 4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직장생활을 가장 즐겁게 한 시간이기도 하고,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시간이기도 하며, 내 인생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나는 첫 팀장님을 너무도 잘 만난 행운아였다.


사실 팀장님과의 첫 기억은 썩 유쾌하지 않다. 최종 면접에 면접관 중 한 분으로 들어온 그분은 유독 나에게 적대적이었다. 다른 면접관들은 웃음도 보여주고, 호의적인 질문도 많이 하셨는데, 그 팀장님만 질문도 많이 하고, 질문마다 시비조로 나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면접을 끝나고 나오면서 ‘아 그 인간 뭐야. 그 인간 때문에 떨어지는 거 아니야?’라고 고민을 할 정도였다.


다행히 최종 면접에 합격되어 첫 출근을 하게 되었고, 배치받은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신입사원 한 두 명씩 배치받은 부서로 인도가 되었고, 나만 홀로 남아 복도 끝쪽으로 이동하는데, 점점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적대적인 인간이 내 팀장이었다.


‘아 젠장. 개 망할.’


물론 이런저런 애교도 부려보고, 철저하게 '을'로서 처신하고 행동했지만, 팀장님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일이 바쁜 건지 신입사원인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철저하게 나를 방치하고 있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었고, 전화받는 일만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께서 일을 하나 주셨다.


“저기 서류들, 종류별로 분류 좀 해주세요”


500여 장 되는 서류 뭉치를 쓰임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양도 많았고, 전체를 보고 빠르게 분류하려면 책상에서 작업하기는 힘들겠다 싶었다. 일단 서류뭉치를 들고 대강의장으로 가서, 서류를 바닥에 펼쳐 놓고 분류작업을 시작했다. 그때 강의실 창문으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팀장님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상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고 한 마디 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펴놓고 작업하는 거 어디서 배웠어요? 일머리가 좀 있네.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팀장님은 나에게 첫 칭찬을 날리시고는 유유히 사라지셨다. 사실 별거 아닌 거 같은 칭찬인데, 그게 지금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첫’이라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얼마 후 팀장님은 나에게 다시 한번 ‘처음’을 선물하셨다. 입사 2-3개월이 지난 어느 날, 팀 회의 시간이었다. 팀 내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던 중 팀장님께서 신입사원인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입사원도 한번 얘기 좀 해봐. 뭐 다른 아이디어 없어?”


물론 전혀 준비가 안된 질문이었기에 체계적으로 답변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회사 내에서 진행하던 교육사업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민을 꺼내 보았다.


"팀장님. 교육은 꼭 강의실에서만 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의견이었다. 신입사원이 던진 다소 황당하고 도발적인 질문에 회의실에는 순간 적막이 흘렀다. 같이 회의에 참석한 대리, 과장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내거나, 말은 하지 않지만 표정으로 쌍욕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희한하게도 인내심 대신 호기심으로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서 계속 떠들었고, 팀장님께서는 가능성 있는 이야기니까 기획서로 정리해 달라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참고자료도 함께 주셨다.  


그렇게 내 첫 기획이 세상에 나왔다. 일명 CH2 프로젝트라는 이름이었고, Human과 Human를 Culture로 이어준다는 명목 하에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뮤지컬을 만드는 기획이었다. 기획은 다듬고 다듬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렇게 내가 만든 교육프로그램 창작 뮤지컬 ‘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시장에서 좋은 반응도 얻었고, 사내에서도 문화예술을 활용한 교육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했다.


만약 회의 시간에, 팀장님께서 나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입사원이 뭘 알아?'라고 다그치고 묵살했다면, 아마 내 첫 프로젝트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뭔가를 기획하거나 잘해보려는 마음 자체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팀장님은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셨고, 입사 2개월의 신입사원에게 또 한 번 '처음'을 선물하셨다.


시간이 흘러 나는 4년간 다닌 능률협회를 퇴사했고, 그 이후로도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 팀장님도 이제는 팀장이 아닌 본부장 직책을 달게 되었다. 나 또한 첫 팀장님을 떠나 여러 명의 팀장님들을 모시며 직장 생활을 했다. 물론 모든 팀장님들에게 최선을 다했고, 업무적으로도 성과를 냈다. 하지만, 많은 팀장님들 중에 내가 마음으로 모셨던 팀장님은 그분 한 명뿐이다. 마음으로 따랐고, 마음으로 존경했고, 지금까지 ‘팀장’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상기되는 인물이다. 여러 가지로 많이 가르쳐 주시고, 나에게 많은 처음을 선물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팀장님을 만나면, 나의 첫 마음을 담아 그냥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설명해 주니, 팀장님께서도 그냥 좋다고 하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팀장님께서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칭찬 한마디, 나에게 허락해 주신 첫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약 15년간의 직장생활을 자신감 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보다 스스로 기획하고 일을 만들어서 하는 습관도 만들어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직장 생활 동안 더 재미있게 일했고 남들보다 조금은 더 빠른 속도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내 첫 팀장님이 해준 첫 칭찬, 과감히 허락해주신 첫 프로젝트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처음’은 언제나 설레고 의미 있다. 비록 나에게는 별 것 아니고, 의미 없는 일일 수 있지만, 내가 선사한 그 처음이 누군가에는 용기가 되고, 꿈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팀원들에게, 선배의 자리에 있다면 후배들에게 잊을 수 없는 처음을 선물해보자. 그게 무엇이든 그 사람이 1년, 10년, 나아가 평생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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