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설명하는 언어
부제: 친구의 부부싸움, 그 누구의 잘못인가?
내 친구는 취업 컨설턴트이다. 전국을 누비벼 취준생을 만나고 스피치나 자소서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한다. 온갖 지방을 누비고 다니는 친구 덕에 나는 지방 강의를 갈 때마다 먹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지역에 있다고 말만 하면, 조식부터 중식,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술 집까지 한 페이지 넘는 카톡이 날아온다.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다.
그런 그에게도 전국 최애 맛집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전라도 광주에 있는 ‘엄마네 돼지찌개’ 식당이다. 나도 친구 따라 한번 가봤는데 맛은 있는데, 맵기가 하늘을 찔러서 두 번 다시 못 올 곳이다 생각했다. 하지만 매운맛 마니아인 친구는 광주에만 가면 어떻게 든 그곳에 들러 그 음식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 꼭 2인분은 포장을 해서 간다. 맛있는 음식 앞에 민망한 검정 봉다리를 들고 KTX에 탑승하는 부끄러움 정도는 그냥 넣어 둔다. 그 정도로 엄마네 돼지 찌개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단단히 화가 나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굉장히 빡이 쳐 있었다. 차분히 듣고 있자니 친구가 열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일명 ‘엄마네 돼지찌개 실종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와이프와 함께 밥을 먹던 친구는 돼지찌개에 밥을 쓱삭쓱삭 비벼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이 찌개 진짜 맛있지? 더 먹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이거 한 숟가락만 먹고 치워야겠다"
그렇게 집을 나선 친구는 퇴근 후에, 남은 돼지찌개를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하기 위해 찌개를 찾았다고 한다. 허나 웬걸, 돼지찌개가 보이지 않는다. 친구의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찌개만 생각하면서 버틴 빡 센 하루였다. 불똥은 이내 와이프에게 튄다.
"여보. 내 돼지찌개 못 봤어?? 아 어디 간 거야??"
"아 그거 여보가 먹고 치운다고 해서 버렸는데"
그 순간 내 친구는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고 한다. ‘치워야겠다’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해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내 친구는 ‘한 숟가락만 더 먹어야겠다’라는 의미로 말을 했고, 와이프는 ‘이제 남은 찌개 버려야겠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실컷 돼지찌개 실종사건의 전말과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듣는 와이프에 대한 뒷담화를 끝낸 친구는 조금 안정을 찾는 듯했다. 이제 내가 끼어들 타이밍이다.
"야 너는 스피치 강의한다는 놈이 말의 기본도 모르냐? 말에는 오해가 없어야 할 것 아니냐?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라도 오해하지. 니 와이프가 뭔 잘못이냐? 말을 똑바로 못 한 니가 잘못이지. 정확하게 말했어야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 안에서 해석하고 판단한다. 관심사 또한 제각각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내 마음과 같이, 내가 의도한 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설명을 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전제로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말이 구체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생략해서 말하거나, 혹은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표현 (최대한, 빨리, 정말 ) 등이 많이 쓰이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와이프는 가사를 담당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남편의 말을 판단했기 때문에 당연히 남은 음식물을 치운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만약 내 친구가
“이거 한 숟가락만 먹고 그만 먹어야겠다. 아껴뒀다 저녁에 다시 먹을 거야. 치우지 마”
라고 좀 더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친구와의 통화를 마치고 편의점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아파트 상가 편의점을 찾았다.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트러블 신호가 온다. 이때, 하필 알바생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급하게 밖으로 튀어 나가서 화장실을 찾아본다. 복도 끝 계단에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화장실은 2층 계단을 이용하세요"
물론 누구나 맥락적으로 계단을 이용해서 2층으로 올라가면 화장실이 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하기까지는 몇 단계의 인지적인 노력을 거쳐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생략되어 있고, 지극히 주관적인 말하기 방식이다. 지식의 저주에 제대로 걸려 있는 사람이다. 아마 나보다 도 심술 굳은 사람이 있다면, 그냥 2층 계단에 볼 일을 보지 않았을까 짓궂은 상상을 해봤다.
말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말한 것을 상대도 똑같이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는 어느 정도 지식의 저주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안 것을 상대도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하게 알아들었을 거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내가 어떻게 전달했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드리냐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해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좋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결국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을 한다는 뜻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잘하는 것도 결국 배려라는 출발선상에서 시작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