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
오늘은 친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일본에서 취업 관련 명사를 초청한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몇 달간 고생한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는 날이다. 그 시작은 일본에서 오는 연사를 인천 공항에서 픽업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 길에 내가 동행했다. 운전기사로 말이다. 1월 비수기에 딱히 할 일이 없는 내 사정을 알고 친구가 행사 진행 알바를 제안했는데, 거기에 기사 업무까지 포함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친구 사이지만 용역 계약서라도 쓸 걸 그랬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 시간, 드디어 연사가 출국장을 빠져나온다. 친구가 잔뜩 긴장한 채로 통역사에게 인사를 전한다.
“죄송하지만, 혹시 마쓰다 상 되십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취업 박람회 행사를 담당하고 있는 00입니다. 바쁘신 데 아침부터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째 친구가 너무 저자세다 싶어서, 핀잔을 주듯이 한 마디 던져 본다.
“야 너 왜 이렇게 저자세야? 쫌 전에 나한테 하던 싸가지는 어디로 증발했냐? 뭐가 자꾸 죄송해.”
“아침 일찍 오시라고 했으니까 죄송한 거지.”
“야 그게 왜 죄송한 거야. 일 때문에 오는 거고, 아침 일찍 와 주신 것은 그냥 고마운 거지”
“죄송한 거랑 고마운 거랑 뭐가 다르냐. 한 긋 차이면 똑같은 거지”
“아니거든. 그 한 긋 차이 때문에 사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거야. 그래서 말 한마디가 중요한 거고”
가끔 주변을 둘러보면 ‘미안하다. 미안한데, 죄송하지만’ 등을 남발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물론 사과의 표현이고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말이지만, 문제는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남발하는 것에 있다.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미안하다고 하고, 죄송한 일이 아닌데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말을 해야 스스로 불편한 마음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어떨까 생각해 보자. 아마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첫 번째는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말하면 괜한 우쭐 감에 그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거나 경솔하게 대할 수 있다. 상대방이 뭔가 진짜 미안하게 있나 보네라는 생각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덩달아 미안해질 수 있다. 상대방이 미안할 일을 하지 않았는데 미안하고 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뭘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은 아껴서도 안 되는 말이지만 남발할 필요는 없다. 상대방이 뭔가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에도 미안하다는 표현보다는 긍정의 의미를 담아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할 때도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가 아니라
“바쁜데 도와줘서 고맙다” 가 좀 더 좋은 표현이고,
식당에서 추가 반찬을 주문할 때도
“저기요. 죄송하지만, 반찬 좀 리필해주세요" 보다
“실례지만, 반찬 좀 리필해주실 수 있나요?” 또는 “여기요. 반찬 좀 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누군가 나에게 요청한 것을 바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보다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는 어떨까?
친구가 준비한 행사가 다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연사를 행사장에서 배웅한다. 친구가 통역사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전해 본다.
“마쓰다 상. 강의장이 좁은 데서 장시간 강의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고친다. 다시 전달한다.
“좁은 강의장 환경에서도 열강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다. 내가 친구에게 ‘잘했어’라는 의미로 밝은 미소를 날려준다. 친구가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지만, 고맙다는 의미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왠지 모르게 마쓰다 상의 표정에서도 친구의 미안한 마음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이 더 잘 전달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고, 회포를 풀기 위해 소주 한잔하러 식당에 갔다. 거하게 쏘는 줄 알았는데, 망할 놈의 또 냉동 삼겹살집이다. 기승전결 냉동 삼겹살집만 오는 녀석이다. 잠시나마 소고기를 기대했던 나의 한심함을 밀어 넣고, 친구의 주문을 기다린다. 친구가 주문할 준비를 마친다.
“이모. 죄송하지만 메뉴판 좀 주세요”
아직 갈 길이 먼 놈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딱 잘라서 말해준다.
“야. 미안한 게 아니라 감사한 거라고!! 끝. 이제 술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