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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줄게’가 아니라 ‘할게’가 맞지 않을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

by 갓기획

오늘은 친구와 함께 공동으로 주최하는 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침부터 친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전날 집에서 와이프와 대판 하고 나온 탓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역시 부부싸움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제저녁이 분리수거하는 날이었는데, 그때 친구가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 분리수거는 내가 해줄게. 오늘은 내가 좀 도와줄게.”


이 말이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래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친구 와이프의 말을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집안일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 안 하지? 그러니까 '해줄게'라고 말을 하지. '해줄게'가 아니라 ‘할게’가 맞는 말 아니야? 집안일에 니 일 내 일이 따로 있니? 네 생각부터 고쳐먹어 이 인간아!!”


물론 내 친구는 충분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해줄게’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 자체에는 분명 선한 의도가 담겨 있다. 와이프를 돕고 싶은 마음에 ‘해줄게’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듣는 와이프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들렸나 보다. 아마 분리수거는 자기 일이 아닌데 선심 쓰듯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 같다. 어쩌면 친구 와이프가 기분 나빴던 것은 친구의 말투가 아니라, 그 안에 깔려 있는 친구의 인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친구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친구 마음속에는‘분리수거는 사실 내 일이 아니지만’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할 일과 와이프가 할 일을 구분해놓고, 와이프에게 ‘이건 사실 네가 할 일이지만, 내가 대신해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라는 무언의 압박까지 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사람에 따라, ‘뭔 차이가 있다고?’, ‘할게’ 든 ‘해줄게’ 든 하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해줄게’라는 말을 듣는 사람의 괜한 자격지심에서 말을 꼬아서 듣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기의 본질을 생각하면 이것은 조금 잘못된 생각이다. 말하기의 본질은 결국 내 말을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했느냐, 또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냐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친구의 와이프가 ‘해줄게’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면, 내 친구가 말을 잘못한 것이 백 번은 맞다고 생각한다.


'하다'는 그냥 하는 것이지만, '해주다'는 베푸는 차원에서 상대를 위해 뭔가를 수고롭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주다’는 ‘하다’와 ‘주다’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인데, 이때 보조 용언으로 쓰인 ‘주다’에는 '남을 위해, 남이 원하니까, 남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듣는 상황에 따라 내가 요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이 괜히 선심 쓰는 듯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충분히 기분이 나쁘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옛말에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겉으로 내뱉는 한마디 말에는 알게 모르게 내 생각과 인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소한 말 습관이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생각과 가치관이 드러나기도 하니, 말 한마디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말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내 생각을 지배하기고, 말하는 데로 생각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말이 인식을 지배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관련해서 ‘워피안(Whorfian) 이론’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미국의 워프라는 학자가 주창한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의 인식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언어가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한다. 말과 생각은 그렇게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내가 생각한 데로 말이 나가기도 하고, 말하는 데로 내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해지고 웃음이 나기도 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말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 습관이 알게 모르게 내 의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할게’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해줄게’, ’ 말해줄게’ 등으로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너를 도와준다는 어떤 권위 의식이 쌓여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대단한 노력이 관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말 습관 하나가 관계를 바꿀 수 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기분이 좋아지고, 누군가는 심하게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쓰는 말 중에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없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친구의 기분은 기분이고, 예정된 대로 오늘 우리는 취업 세미나를 준비해야 한다. 예산이 넉넉치 않아서 나랑 친구는 강의도 하고, 세팅도 하고, 수강생 응대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야 한다. 내가 컴퓨터를 세팅하고 있는 동안, 저 멀리서 친구의 말이 들려온다.


“야. 자리 세팅은 내가 해줄게 "


아직 갈 길이 먼 놈이라는 생각과 함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소중한 친구를 위해 한 마디를 아끼지 않는다.


“야. 미친 xx야. ‘해줄게’가 아니라 ‘할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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