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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기획 Feb 08. 2021

끝을 정하는 것의 의미

박카스 광고는 예나 지금이나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실 세계를 맛깔나게 묘사하면서도 탁월한 공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OOO으로 산다는 것’ 편이다.


광고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방에 누워서 TV를 보던 취업 준비생이 TV 속 직장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부럽다, 사표 쓸 회사도 있고”


다시 장면은 바뀌고, 이번엔 군대 내무반의 이등병이 그런 취업 준비생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부럽다. 누워서 TV도 보고”


마지막 장면은 포장마차 속 직장인들 모습이다. 직장인들은 그런 군인을 보며 다시 이렇게 말한다.


“부럽다. 저 시절이…”


광고속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부러워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어쩌면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고, 지나간 시절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두 박자의 어딘가쯤에 보조를 맞추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이처럼 부러움은 자연스레 우리 삶의 단면에 녹아있다. 그 면을 절묘하게 광고에 녹여냈기에 웃음도 나고 깊이 공감이 간다.


그런데, 이 광고에서  아이러니한 장면 한 가지직장인이 군인을 부러워하는 대목이다. 굳이 ‘직장인이 군인을 왜?’ 라는 의문이 자리 잡는다. 그 찰나의 순간, 광고에는 이런 음성이 깔린다.


“부럽다. 저 시절이. 그래도 저 때는 [끝]이 있었잖아. “


‘끝이 있었잖아’


이 말이 왜 그렇게 가슴을 파고들었는지 모르겠다. 비록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한 끝이 었지만, 군인 시절에는 그래도 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고, 유일한 낙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하고, 취업을 한다. 이때부터 끝이 없는 기나긴 회사 생활이 시작된다. 풍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회사 생활은 그냥 현실이고, 때론 피하고 싶은 지옥이 되기도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터널 어딘가를 지나는 것 같다. 드라마 속 낭만적인 회사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현실 회사 모습에 좌절할 때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난 몇 년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나의 감정들이다. 힘들고, 괴롭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 버텨야 했던 지난날의 자화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막막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 내 스스로 그 끝을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흔에는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나는 그 시간의 끝을 마흔으로 했다. 최소 세 권의 책을 쓰고, 커피숍을 사무실 삼아 집필과 강의를 하면서 좀 더 자유롭게 사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마음으로 15년을 버텼다. 직장 생활의 끝에 새로운 삶이 펼치지길 희망했다. 그 끝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연찮은 계기로 인해, 정확히 나이 마흔에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오늘이 걱정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늘 고민이다. 고민의 종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하지만,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된다는 점에서 고민의 질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지난 15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많은 동료들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꿈을 잃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회사 생활이 종착역인 것처럼 미래에 대한 준비도, 꿈도 없도 보였다. 그냥 버티고 버틸 뿐이었다. 물론 ‘존버’ 도 하나의 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덧 회사에서 나가야 할 시점은 가까워진다. 실제로 회사를 다니면서 너무나 쓸쓸하게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의 초라한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에 더 강하게 새겼다.


‘내 끝은 내가 정한다.’


회사를 나간다는 마음이 아니라, 회사를 나가기 위해 일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더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래서였을까?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좀 더 몰입할 수 있었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나름의 성과도 만들어 내며,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 노력의 끝에 내 꿈과 조금 더 가까워진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끝을 정하고 일을 하니 지금이 더 소중해지고,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던 것 같다.


관련해서, 때 죽음 체험이 유행한적이 있었다. 유언장을 쓰고, 입관을 하고, 하관을 하는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 죽음을 미리 경험해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죽음체험의 인기를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단순히 재미, 새로움, 신선함 등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확한 해석은 아니지만, 나름의 결론은 이렇다.


‘죽는 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삶이 더 소중해진다’


사람들이 죽음 체험을 하는 이유는 '내 삶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끝을 경험해 보고, 현재를 다잡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회사는 내 삶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거쳐가는 정차역일 뿐, 종착역은 아니다. 내 꿈을 펼치기 위한 연습 무대일 뿐이다. 아직 본 무대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 연습 무대의 ‘끝’을 스스로 정했으면 좋겠다. 회사의 요구에 의해서, 어쩔 수 없어서, 시간이 다 되서가 아니었으면 한다. 치열한 노력과 철저한 연습으로 준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끝을 정하면 내 인생은 더 선명해지고, 지금을 버틸 강한 힘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끝은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시간의 흐름 속에 흘러갈것인가?
끝을 정하고 조류를 거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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