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골프를 치는친목 모임이 있었다. 총 6명이 활동하는 모임이었고, 나는 이 모임의 막내였다. 모임 이름은 멤버들 모두 어설프게 연예인을 닮았다고 해서 '짝퉁회'였다. 모임에서는 모두 닉네임을 썼는데 내가 박효신이었고, 내 바로 위의 형이 마동석이었다. 그 위로 이경규, 장동건 등의 형이 있었다. 모이기만 하면 서로의 외모와 골프 실력을 비하하며 깍아내리기 일쑤였지만, 그 어느 모임보다 끈끈하고 따뜻한 모임이었다. 단체 카톡방에는 하루에도 수 백개의 메시지가 오가며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석을 코앞에 둔 이른 아침, 단톡 방에 믿기지 않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마동석 부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평소에 심한 장난을 곧 잘 하고는 했지만, 이번 거는 '장난이 너무 심한거 아니냐'며 그 메시지를 올린 멤버를 비난하기도 했다. 마흔도 안된 나이 인 데다가, 그 전날 저녁까지 신나게 카톡을 날리던 형인데, 부고라니 도저히 앞 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혼란과 충격도 잠시, 동석이 형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동석이 형의 장례식장에 모여 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오열이 쏟아졌다.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내 딸아이의 케이크를 사들고 찾아왔던 형인데, 영정 사진 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동석이 형의 딸은, 아빠가 죽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례식장 한 귀퉁이에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 날을 보내고, 다시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술잔만 비우고 있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하루아침에 잘 못될 수 있겠구나' , ‘내 딸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형의 죽음과 유족들의 슬픔 앞에서 내 안위나 걱정하고 있다니, 그런 내가 못 견디게 싫어졌다.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옆에 있는 형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형. 슬픈 건 슬픈 건데, 나도 좀 무섭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가는 거.”
옆에 있는 형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이야기한다.
“동석이가 그거 가르쳐 주고 가는 거다.”
그렇게 동석의 형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과 공포로 다가왔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도 곧 잦아들고 난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갔다.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점점 동석이 형의 묘지에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제 형에 대한 기억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동석이 형이 주고 간 가르침은언제부터인가내 삶을 지배하는제1원칙이자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나도 갑자기 잘못될 수 있다. 내 삶의 끝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자’
지병이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과말 그대로 한방에 훅 가는것처럼 갑자기 죽는 것의차이는 컸다. 게다가 나랑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것이 꼭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죽음의 순간을 가정하고 보니 내 인생의 많은 것이 달라지기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에 감사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더 치열하게 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자 술을 줄인다던가, 담배를 끊는다던가, 운동을 한다던가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새겨진 ‘끝’이라는 단어는 지금 이 순간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경험이 있거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특히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늘 하루를 그 어떤 이보다 치열하게 살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낸다.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함은 그 어떤 방법보다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다. 끝을 가정하면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그래서일까? 한 때 많은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나마 유서를 써본다거나, 하관 체험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삶의 의미를 재발견 해보는 경험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타이탄의 도구들'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이상한 시계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살 날까지의 시간을 계산하여 D-00일로 알려주는 특별한 시계이다. 일명 ‘인생 카운트 다운 시계’라고 한다. 현재 나이, 흡연/음주 등의 생활습관, 기타 신체 정보 등을 입력하면, 내가 죽는 날을 역산하여 앞으로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표기된다.
물론 이 시계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백만 가지 확률과 내 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내가 죽는 날을 정확하게 계산해 주지는 않는다. 이 시계의 가치는 그것에 있지 않다. 내 삶의 끝을 가정해 보고, 나에게 남겨진 시간의 의미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해 보는 것에 이 시계의 가치가 있다.
게다가 이 시계는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한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000일 후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구체적인 것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남은 하루하루가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매사 소흘함이 없이더 열심히 살게 된다. 그래서 남들보다 성공에 조금 더 빠르게, 가깝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하루의 끝에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꽉 채웠는가?'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삶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고, 결과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상, 내 삶은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글은 요즘세대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은 이시대 직장인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며, 어느 순간내 빈틈을 파고든 나의 오만과 나태함을 경계하고 앞으로도 더 치열한 삶을 살기 위한 내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