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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기획 Aug 23. 2019

제22화 : 끝을 생각하면 달라지는 것들

꼰대니까 할 말은 좀 할게

같이 골프를 치는 친목 모임이 있었다. 총 6명이 활동하는 모임이었고, 나는 이 모임의 막내였다. 모임 이름은 멤버들 모두 어설프게 연예인을 닮았다고 해서 '짝퉁회'였다. 모임에서는 모두 닉네임을 썼는데 내가 박효신이었고,  내 바로 위의 형이 마동석이었다. 그 위로 이경규, 장동건 등의 형이 있었다. 모이기만 하면 서로의 외모와 골프 실력을 비하하며 깍아내리기 일쑤였지만, 그 어느 모임보다  끈끈하고 따뜻한 모임이었다. 단체 카톡방에는 하루에도 수 백개의 메시지가 오가며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추석을 코앞에 둔 이른 아침, 단톡 방에 믿기지 않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마동석 부고'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평소에 심한 장난을 곧 잘 하고는 했지만, 이번 거는 '장난이 너무 심한거 아니냐'며 그 메시지를 올린 멤버를 비난하기도 했다. 마흔도 안된 나이 인 데다가, 그 전날 저녁까지 신나게 카톡을 날리던 형인데, 부고라니 도저히 앞 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혼란과 충격도 잠시, 동석이 형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동석이 형의 장례식장에 모여 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오열이 쏟아졌다.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며, 내 딸아이의 케이크를 사들고 찾아왔던 형인데, 영정 사진 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동석이 형의 딸은, 아빠가 죽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례식장 한 귀퉁이에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첫 날을 보내고, 다시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술잔만 비우고 있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하루아침에 잘 못될 수 있겠구나' , ‘내 딸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형의 죽음과 유족들의 슬픔 앞에서 내 안위나 걱정하고 있다니, 그런 내가 못 견디게 싫어졌다.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옆에 있는 형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형. 슬픈 건 슬픈 건데, 나도 좀 무섭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가는 거.”


옆에 있는 형이 내 어깨를 다독이며 이야기한다.


“동석이가 그거 가르쳐 주고 가는 거다.”


그렇게 동석의 형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과 공포로 다가왔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도 곧 잦아들고 난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갔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점점 동석이 형의 묘지에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이제 형에 대한 기억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동석이 형이 주고 간 가르침은 언제부터인가 내 삶을 지배하는 제1원칙이자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나도 갑자기 잘못될 수 있다. 내 삶의 끝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자


지병이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과 말 그대로 한방에 훅 가는 것처럼 갑자기 죽는 것의 차이는 컸다. 게다가 나랑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것이 꼭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죽음의 순간을 가정하고 보니 내 인생의 많은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에 감사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더 치열하게 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자 술을 줄인다던가, 담배를 끊는다던가, 운동을 한다던가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새겨진 ‘끝’이라는 단어는 지금 이 순간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경험이 있거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거나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특히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늘 하루를 그 어떤 이보다 치열하게 살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낸다. 죽을 수도 있다는 절박함은 그 어떤 방법보다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다. 끝을 가정하면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 때 많은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나마 유서를 써본다거나, 하관 체험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 삶의 의미를 재발견 해보는 경험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베스트셀러 '타이탄의 도구들'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이상한 시계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살 날까지의 시간을 계산하여 D-00일로 알려주는 특별한 시계이다. 일명  ‘인생 카운트 다운 시계’라고 한다.  현재 나이, 흡연/음주 등의 생활습관, 기타 신체 정보 등을 입력하면, 내가 죽는 날을 역산하여  앞으로 내가 살 수 있는 날이 표기된다.



물론 이 시계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백만 가지 확률과 내 몸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내가 죽는 날을 정확하게 계산해 주지는 않는다. 이 시계의 가치는 그것에 있지 않다. 내 삶의 끝을 가정해 보고, 나에게 남겨진 시간의 의미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해 보는 것에 이 시계의 가치가 있다.


게다가 이 시계는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한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000일 후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구체적인 것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남은 하루하루가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 소흘함이 없이 더 열심히 살게 된다. 그래서 남들보다 성공에 조금 더 빠르게, 가깝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하루의 끝에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


'나는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꽉 채웠는가?'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삶을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고, 결과적으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상, 내 삶은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글은 요즘세대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은 이시대 직장인들을 위한 글이기도 하며,  어느 순간 내 빈틈을 파고든 나의 오만과 나태함을 경계하고 앞으로도 더 치열한 삶을 살기 위한 내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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