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벌써 9살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게 엊그제이고, 엄마 아빠 말이라면 무조건 '응응' 하던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요즘은 나름의 논리로 무장해서 엄마 아빠와 대적하는 무적 초딩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에는 늘 TV 채널 선택을 위한 리모컨 쟁탈전이 있다. 우리 집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전쟁이다.
리모컨 전쟁에서 바락바락 딸을 이겨먹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늘 딸에게 양보하고 져주기 때문에 아빠와 같이 있는 시간만큼은 꼬맹이가 늘 리모컨을 독점한다. 그 덕분에 나는 초딩들의 신세계도 경험하고, 평생 한번 볼까 말까 한 음악 쇼프로그램을 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아이돌 그룹의 인터뷰를 보다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사회자 : 오늘 무대 어떠셨어요?
아이돌 : 생각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사회자 : 준비하면서 힘드셨을 텐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아이돌 : 홀가분하기는 한데, 몇 군데 실수를 해서 슬픈 것 같아요.
나는 이 지점에서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슬퍼요’가 아니라 ‘슬픈 것 같아요’ 였기 때문이다. 슬프다는 것은 분명 자신의 감정일 텐데, 자신의 감정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같아요’라는 애매모한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런 표현 방식은 비단 아이돌만 쓰는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요즘세대들이 ‘넵’ 다음으로 많이 쓰고 있다는 ‘같아요’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요즘 세대들은 도대체 왜 ‘이다’나 ‘맞다’와 같은 표현 대신 불확실성 추측성 어미인 ‘같아요’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3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이유는, 비교적 긍정적인 의미로 겸손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너무 나대거나 잘난 척하거나, 확신에 찬 표현은 상대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기에 극 겸손 어미인 ‘같아요’를 붙여 쓰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에 최대한 둥글둥글한 표현을 찾다 보니 최적화된 표현이 ‘같아요’ 만한 것이 없다.
A : 야. 너 이번에 너 대단했어. 잘했다.
B : 감사합니다. 결과가 좋게 나온 것 같습니다.
A : 너는 잘하는 게 뭐니?
B : 저는 탁구를 잘 치는 것 같습니다.
등으로 진짜 잘하기도 하고, 진짜 잘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겸손함을 드러내고자 ‘같아요’라는 말을 끼워 넣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유는, 선택의 어려움에 따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정보가 있고 대안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영 자신이 없다. 선택을 할때마다 고민이고, 확신할 수 없다. 행사 업체를 선정하는 데 A도 좋은 것 같고, B도 좋은 것 같다. 이때 팀장님께서 호출하신다.
팀장 : 박주임 행사업체 선정했어?
박주임 : 예. 제 생각에는 A가 좋은 것 같습니다.
팀장 : 오케이. 그럼 A로 진행해
라고 지시하면서 자리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돌아서는 등 뒤로 팀장님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A가 좋은 게 아니라, A가 좋은 것 같다고? 담당자가 그렇게 확신이 없어서,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어?
마지막 이유는,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정답만을 요구하고 정답만이 통용되는 시대, ‘같아요’ 란 표현은 정답이 아닌 경우 빠져나갈 수 있는 확실한 묘수가 되어준다.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같아요’라고 말함으로써 정답이면 좋은 것이고, 정답이 아니더라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마케팅 계획은 A안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의 이면에는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하기에 ‘나는 A를 선택하기는 하지만, A가 좋을 것 같다고 했을 뿐 A로 하자는 얘기는 아니었다. 고로 A가 잘못돼도 나는 책임이 없다’라는 생각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회사는 실수가 용납되는 곳이 아니다. 물론 겉으로는 ‘실수를 하면서 배우는 거지’, ‘실수는 병가지 상사지’라고 말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 실수는 그 사람에게 낙인처럼 붙어있고, 그 낙인이 쌓이다 보면 일 못하는 사람,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요즘세대들은 정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 누구보다 많이 노력한다. 그리고 최종 보고나 의사 표명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내 선택이 정답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000인 것 같아요’
정답이기를 바라는 마음 뒤에 책임을 지기도 싫은 마음과 자신감이 없는 마음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시험문제나 수능 문제와 다르게 회사일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 같던 일이 오답이 되기도 하고,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답이 되는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정답에 가까운 일만 있을 뿐이다. 물론 상사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회사일에 정답은 없다.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사가 실무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담당자의 명확한 생각과 책임감이다. 여기에 준비된 자의 자신감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요즘세대들이 날려오는 ‘같아요’와 같은 애매모호하고 자신감 없는 표현은 상사에게 신뢰감을 주기 힘들고, '나보고 더 파악해서 결정하라는 이야기인가?'라는 의구심을 남겨둘 수 있다. 또한 ‘같아요’라고 말하면서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떤 사안이나 상황을 파악함에 있어서 내 준비가 부족했다는 인식을 피할 수는 없다. 차라리 정답이 아닐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 있게 ‘00 임이 맞습니다.’, ‘00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그에 합당한 이유나 근거를 말하면서 설득하는 편이 낫다.
‘같아요’란 표현은 내 선택을 강요하기보다 상대방에게 여지를 남겨두는 겸손한 표현이자 인간관계를 말랑말랑 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표현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남발하고 악용하는데서 시작된다. 법이 자꾸 개정되는 것도 악용하는 사람 때문이고, 회사의 관리 감독이 갈수록 빡세지고 타이트해지는 것도 그 빈틈을 노리고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같아요'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좋은 의미나 취지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만, 습관이 되고 반복이 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면 결국 '같아요'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책임감 부족이나 자신감 결핍이라는 오명이 씌어질 것이다.
사실 '같아요'는 요즘 세대 뿐만아니라 지금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습관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대한민국 회사의 분위기를 반영해주는 슬픈 자화상과도 같은 말이다. '답정너', '무조건 안된다', '니가 뭘알아?' 를 남발하는 상사의 폭격에 한번 꺽는 기술을 발휘하며 뒤로 자신을 숨기는 것이 습관화 된 것은 아닐까? 분명 서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글이 요즘세대를 향하는 메세지이기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본다.
'같아요'라는 좋은 말을 아끼지 말되, 딱 필요한 순간은 좀 더 준비해서 소신있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참고자료
책정보, 보고서의 정석 : 네이버 책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