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갓기획 Sep 21. 2019

제35화:말은 잘하는 것보다, 아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꼰대라서 할 말은 좀 할게

캐논에서 근무할 당시 나는 교육 담당자였다. 한샘 사건 이후 왠지 약간은 불명예스러운(?) 직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딱 그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물론 내가 사건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사건은 한샘 사건 이전에 캐논 사건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다.


캐논에서 내가 기획하고 운영하던 교육 프로그램 중에  판매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있었다. 3일 동안 외부 연수원에서 진행되는 교육인데, 어느 날 교육이 다 끝나고 본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육 기간 중에 어떤 남자 교육생이 여자 교육생 1명을 방에 가두고 강간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본사에 퍼지기 시작했고,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교육 담당자인 내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즉시 교육에 참석했던 직원들이 근무하는 판매점으로 달려가서, 탐문조사를  시작했다.


개략적인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교육 2일 차 종료 후, 연수원 휴게실에 모든 교육생이 모여 간단하게 술을 마셨고, 술자리가 끝나고 다들 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한 남자 교육생이 여자 교육생을 방에 가둔 뒤, 아이패드로 야한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강간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제 사건 당사자들에게 직접 확인할 차례다. 먼저 남자 교육생을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펄펄 뛰면서 부인한다. 예상한 결과였다. ‘아이패드로 동영상 보여주면서 이상한 짓 시도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지면서, 말을 이어간다.


“아니. 보여준 게 아니고요. 술자리에서 내가 아이패드를 보고 있으니까 그 여자 직원이 뭐 재밌는 것 있냐면서 자기가 가져가서 보다가, 갑자기 야동 사이트 링크가 연결돼서 야동이 재생이 되었고. 순간 당황해서 아이패드를 다시 나에게 던진 일은 있었다. 근데 방에 가둔 건 사실이 아니고, 강간 시도라니 진짜 말도 안 된다.”


너무나 강력하게 부인하기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연수원 CCTV를 확인하면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수도 있으니, 괜한 추궁은 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자 교육생에게 전화를 해서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마음이 무겁다. 상처가 클 텐데, 다시 그 날의 일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도 피해자의 진술이 빠질 수는 없으니까, 힘겹게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자 교육생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 슬퍼서 운다거나, 분노에 차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다. 왜 그런 이야기가 퍼졌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비에서 술자리가 끝나고 방에 들어가는 길이었어요. 그 남자 직원이 손을 뻗으면서 저를 불렀는데, 우연히 그 손이 제 겨드랑이 사이에 끼면서 2초 정도 머물렀어요. 기분은 좀 나빴지만,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를 해서 그냥 넘어갔죠."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여자 직원을 피해자로 만들었고, 그 남자 직원을 강간 미수범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여자 직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도무지 그런 소문들이 왜 돌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덩달아 당황했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해본다.


“그러니까. 강간이 아니고, 손이 그냥 2초 정도 머무른 거라고요? 2초? 그럼 혹시 그 얘기를 어디 가서 하신 적이 있나요?”


그랬더니, 그 여자 교육생이 말을 이어간다.


“예. 방에서 3-4명 여자끼리 술 한잔 더했는데.. 그때 거기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지나가는 얘기로 하긴 했어요. 정말 잠깐 한 이야기인데. 그게 그렇게 소문이 난 건가요?”


“아 그러셨군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 복잡했던 강간 사건이 한 줄로 정리되었다. 그 사건은 그냥 '우연히 뻗은 남자의 손이 여자 교육생의 겨드랑이 사이에 2초 머문 사건'이었다. 어쨌든 사건은 잘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마치 탐정이 되어 미제사건이라도 해결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근데 마음은 왠지 무겁고, 무섭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얘기들이 모여서 ‘우연히 손이 2초 머문사건’ 을 ‘강간사건’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섬뜩하고 무서웠다.


‘가슴 쪽에 2초 정도 살짝  손이 머물렀다’는 누군가의 입에서 ‘만졌다’로, 그리고 또 누군가의 입에서 ‘강간으로’ 말이 바뀌었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라는 말은 ‘방에 가뒀다’로, ‘아이패드를 보다 우연히 재생된 야동 이야기’는 '야한 동영상을 틀어서 억지로 보여준 장면’으로 둔갑시켰다.


이 모든 말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완성되는 데는 불과 하루 24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단한 스토리텔링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빠른 시간 만들어낸 스토리로 삽시간에 사람들의 관심까지 사로잡았으니 정말 대단한 능력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번 퍼져 나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었고, 강간 미수범이라는 오명을 쓴 남자 교육생은 그렇게 오해받은 것도 기분이 좋지 않고,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자기를 그렇게 보는 것 같아서 힘들다며 결국 퇴사를 했다.


결국 가장 보호받아야 할 직원은 보호받지 못했고, 정작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말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딘가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목을 겨누는 칼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새치 혀는 그렇게 칼이 되어 또 누군가를 겨눌 준비를 하고 있다.


벌써 15년도 더 된 영화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최고의 영화로 남아있는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있다. 여러 가지 명장면과 명대사를 남겼지만, 결국 이 영화의 시작이자 가장 의미 있게 명대사‘모래알이든 바윗 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예요’가 아닌가 .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의 크기가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그 크기에 관계없이 상대방에게는 같은 의미를 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그렇게 어떤 말이든 같은 무게를 가지니 그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언제나 이불 킥 백만 번을 하면서 후회하는 순간은 '어떤 말을 해서였지', '그 말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후자는 언젠가 다음 기회가 남아있다. 좀 더 생각해서 정리해서 판단하고 말할 기회가 남아 있지만, 전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내 손을 떠난 화살이다.


말은 안 해서 후회할 때보다
해서 후회할 때가 더 많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동안 엄마에게, 와이프에게, 친형에게, 친구에게, 후배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했던 말과 그 순간들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요즘 것들의 말을 보면 도대체 못 알아먹을 외계어들이 많다. 진짜 그들의 표현대로 ‘별다줄’이다. 진짜 ‘별걸 다 줄인다.’ 알아먹지 못할 축약어가 너무 많다. 솔직히 많기도 많고, 하나도 모르겠고, 그래서 마음에 안들 때도 있지만 그중에 몇 가지는 꽤 잘 만들어진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TMI’ 이거 딱 마음에 드는 말이다.


말이 많고, 말이 길어지면,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이 많으면 그 안에 상대방이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도 분명 담기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의 소재가 될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한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자.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어떤 말을 또 떠들어대고 다녔는지,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남발하고 다녔는지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마지막으로 이제 막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요즘것들에게, 딱 두 가지만 아끼라고 조언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돈 아껴 쓰고, 말은 더 아껴 써라.’




매거진의 이전글 제34화:요즘세대가 챙겼으면 하는 디테일의 새로운 정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