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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기획 Dec 04. 2019

제64화 : ‘가까이’의 함정, ‘가까이’의 소중함

사이 글, 나는 살면서 이런 걸 배웠다

1년 만에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았다. 지난가을 7080 주점에서 레트로 감성을 제대로 느끼다가, 지갑과 함께 유명을 달리한 녀석이었다. 평상시 차로 출퇴근을 하지 않는 데다,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에 '재발급받아야지, 받아야지' 생각만 하다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게다가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5분 거리에 ‘용인 운전면허시험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년간 운전 면허증 재발급을 미루고 또 미루어 왔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운전면허증은 어떤 형들의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자칫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재발급받지 않아도 되었을 운전면허증은 친한 형들의 조력 아닌 조력에 의해 다시 내 지갑으로 돌아왔다. 친한 형들 가족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우리 가족을 포함한 총 세 가족은 나란히 제주도에 도착하여, 렌터카 업체를 찾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부부 모두 운전자 등록을 했는데, 우리 가족은 면허증이 없는 나를 제외하고 와이프만 운전자로 등록을 했다. 그 사소한 불씨에서 일이 커지기 시작한 건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모여서 술파티를 벌인 시간이었다.


평소 장난기가 심한 형들이, 렌터카 얘기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 물었다 하면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탈탈터는 형들이 먹잇감을 놓일 리가 없었다. 사정없이 몰아 치기 시작한다. 휘몰이 장단이 시작된다.  


 ‘너는 왜 면허증이 없냐’
 ‘와이프 몰래 음주운전 걸려서 면허 취소된 거 아니냐’
 ‘며칠 전에 연차 쓰고 혼자 커피숍에 글 쓰러 간다고 하더니, 음주운전 재교육받으러 간 거 아니냐?’
 ‘한 달 전에 차 바꿀 때,  왜 니 명의가 아니라 와이프 명의로 했냐?’


등등 온갖 굴레를 다 덮어 씌우며, 코너로 몰아갔다. 진짜 신기하리만큼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너무 완벽하게 짠 형들의 프레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 자체가 웃고 즐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적당히 끝나는 줄 알았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완벽한 내 착각이었다. 초특급 울트라 A형 초예민 스타일 와이프는 적당히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악마와 사탄의 모함을 진실로 믿고 있었다.
 

술도 적당히 취했겠다, 피곤해서 자려고 누웠는데, 와이프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너 진짜냐?'
 (내가 두 살이나 많은데, 존칭이 사라졌다.)


 '얼마 날려먹었냐?'
 (돈 생각까지 더해져서 빡침이 극에 달했나 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거의 확신에 가깝다.)


와이프는 그렇게 확신에 찬 의심을 쏟아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제주도 여행이 끝나고, 바로 면허시험장으로 튀어가서 재발급받겠노라 약속을 하고 나서야, 초특급 예민녀의 걱정을 잠재우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그 의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1년간 미루고 또 미뤄둔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날이었다. 운전면허증을 받고 나오는 길에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평소 내 스타일과 맞지 않는 일처리 방식에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도 몰려왔다. 평소 일을 함에 있어서는 ‘추진력 갑, 실행력 짱’으로 불리며 ‘임도저’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지척에 있는 면허 시험장에 가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음주운전면허취소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을까?


나는 이게 바로 '가까이'의 함정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가까이 있기에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등한시하게 되고, 멀리 하게 되고, 안이한 생각이 더 쉽게 자리 잡는 것은 아닐까?


비슷한 논리로 회사에 지각하는 직원들의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1시간 이상 떨어진 지역에 사는 직원들이 회사 근처에 사는 직원들보다 지각하는 경우가 더 적었던 것 같다. 물론 증명된 사실도 아니고,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겠지만, 가끔 지각을 하는 직원들을 보면 통근이 채 20-30분도 걸리지 않는 직원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계산 속에는 ‘금방 가니까, 가까우니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딱 맞춰 출발하게 되고, 혹시나 지하철이 지연되거나, 버스가 안 오거나, 차가 밀리는 등의 예상치 못한 변수에 5분이나 10분 정도 늦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아닐까?
 
반대로 멀리서 통근을 하는 사람들은 긴 거리나 긴 시간 동안 일어날지 모르는 변수를 예상해서 적어도 20-30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게 출발하다 보니 좀 더 지각할 확률이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있어서 드는 안일한 생각은 지각 확률을 높이고, 반대로 적당한 긴장감이 지각 확률을 낮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까이의 함정'은 비단 물리적인 거리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처음 만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는 깍듯하게 잘하고 챙기지만, 내게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그 거리조차 분간이 안 가는 사람에게는 소홀하게 되는 현상 말이다.


어느덧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니 예전보다는 좀 더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은데, 대부분 부모님 상인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내 나이 또래의 선배나 동갑내기 친구 본인 상인 경우도 있다. 적지 아니 충격적이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한다. 한번 더 만나고, 더 잘해줄 걸 하는 아쉬움만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잔인한 생각일 수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소중한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꼭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부터, 내 주변 사람들이 좀 더 소중해지고,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내, 가족, 친한 친구, 직장 동료 등등. 내게 너무 소중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빈자리를 가정해보니, 뭔가 더 절박하고 그 사람의 존재가 더 소중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지옥 만드는 법은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미워하면 됩니다.
천국 만드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가까이에서 시작됩니다.

-책, 고난이 선물이다 중에서 -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가까운 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가까이 있기에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할 뿐이다. 그러나 내 옆을 떠나고 없을 때 그제야 그 소중함을 느낀다. 때론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아침마다 잔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와이프, 같이 일할 수 있는 팀원들, 옆자리의 김대리, 퇴근 후 맥주 한잔 할 수 있는 박 과장, 이 모든 것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소중함 일 수 있다. 오늘 하루만큼은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던 소중한 것들의 빈자리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더 소중하게 그들을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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