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라서 할 말은 좀 할게
기획팀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기획서를 썼고, 후배들의 기획서를 검토하는 일을 했다. 기획서는 쓸 때마다 어렵고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었지만, 다 쓰고 나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가장 크게 안겨주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쓰면 쓸수록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나에게 있어 기획서 쓰는 일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성처럼 어려운 일로 남아있다.
나도 나지만 후배들은 기획서 쓰는 일을 더 어려워했다. 그런 후배들의 기획서를 잘 지도해 주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적이 많았다. 후배들이 가져온 기획서를 보고 있으면 2장을 넘기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오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다. 일단 되는대로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전달하고 다시 돌려보낸다. 잠시 후 다시 가져온다. 역시나 돌려보낸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수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총 4-5번의 길고 지루한 과정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윗선에 보고할 수 있는 기획서가 만들어진다. 기획서를 쓴 후배도, 그걸 지도하는 나에게도 힘든 시간이 이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기획서를 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기획서에 대해 제대로 피드백해주는 능력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피드백을 할 때 한 번에 정리해서 말해주지 못하고, 그때그때 보이는 것만 지적해준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덕분에(?) 그때그때 수정을 해야 하는 후배를 힘들게 했고, 나 또한 반복되는 수정 과정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소위 까이는 기획서의 특징에 대해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상사에게 들었던 피드백인 동시에 내가 후배들에게 해주었던 피드백이기도 하다. 이를 4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상사가 내 기획서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을 토대로, 내 기획서가 까이는 4가지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소위 싸가지 없는 기획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핵심이나 결론이 없다는 이야기다. 현황이나 분석 결과는 잔뜩 담겨있는데, 정작 상사가 원하는 ‘무엇을, 어떻게’가 없는 경우이다. 기획서를 잘 쓴 사람은 언제나 문제와 해결책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문제니, 이렇게 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다. 주변부를 건드리지 않고, 핵심을 쑥 지르고 들어온다. 핵심이 있어야 살아남는 기획서가 된다. 철저한 조사와 고민이 있어야 가능하고, 책임감까지 더해져야 가능한 결과이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딱 핵심만 이야기한다. 고민의 깊이만큼, 뭐가 중요하고 핵심인지 잘 알 수 있다. 기획서를 다 쓰고 나서 반드시 이렇게 물어보자.
‘핵심이 뭐지? 한마디로 뭐라고 하지?’
만약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정보만 가득한 기획서나 잘 꾸며진 기획서는 예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 안에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나의 해결책, 결론이 담겨 있어야 기획서로서의 가치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가 상사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밖에 없다.
기획서는 기본적으로 ‘생각’을 담는다. 어떤 현상이나 그에 대한 분석 결과도 담기지만, 기본적으로 내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생각을 담는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가장 큰 변수는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쉽게 동의해 주지 않는다. 특히 상사의 경우 온갖 무기로 무장해서 내 기획서를 탈탈 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획서에는 내 생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들이 충분해야 한다.
사실과 의견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의견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근거를 충분히 제시해야 한다. 환경 분석, 고객 데이터, 유사 사례, 벤치마킹 사례 등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의견 뒤에는 꼬리표처럼 이유와 근거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본 것을 본 대로 보고하라, 들은 것을 들은 대로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분해 보고하고,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
- 이순신 장군 -
Fact- Based 사고를 강조한 이순신 장군의 명언처럼, 증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철저하게 자료를 조사해서 상사의 공격에 논리로 대비하자. 그렇지 못할 경우, 내가 상사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소설 쓰냐?’라는 말 밖에 없다.
1편에서는 기획서가 까이는 이유중 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2편에서는 기획서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