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라서 할 말은 할게
앞서 1편에서 기획서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고, 지금부터는 기획서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기획서를 꾸미고 작성하는 구체적인 스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획서를 작성함에 있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태도이자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획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부분 논리도 중요하지만, 기획서의 첫 줄에 눈을 덴 순간부터 끝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이 중요하다. 기획서는 비즈니스 문서이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글이다. 설득 가능한 구조로 작성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설득에 가장 최적화된 방식은 스토리 형식으로 쓰는 것이다.
기획서의 스토리는 4단계로 구성된다. 기획의 내용이나 주제에 따라 달라지고 세분화되기는 하지만, 큰 맥락에서 4단계의 흐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Why-What-How-So What
내가 이 기획을 '왜' 하는지 기획의 이유와 배경을 시작으로, 구체적으로 핵심 과제는 '무엇'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 (일정, 사람, 예산) 하겠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 기획을 통해 내가 달성하려는 '목표 및 기대효과'를 제시하면 된다. 이 네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가는 과정이 기획서의 스토리이자, 기본적인 목차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기획서의 흐름은 '명분으로 시작해서 실리로 끝낸다'이다.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기획을 시작하는 '이유'와 이 기획을 통해 가져올 '이익'이다.
기획서가 읽히지 않는 데는 수 백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는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렇다. 보통 기획의 내용은 기획을 하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실무에서 손을 뗀 상사는 모르는 내용인 경우도 많다. 이때 나의 지식이나 경험에 갇혀서, 나만 아는 용어, 전문용어, 약어, 정리가 안된 용어 등은 상사에게 외계어로 들릴 수 있다. 가급적 쉬운 용어나 정리된 용어, 합의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기획서의 목적을 해석에 두면 안 된다. 기획서의 목적은 설득이다. 상사가 내 기획서를 해석한다가 끝난다면, 결국 남는 것은 기획서를 다시 쓰는 일밖에 없다.
둘째, 기획서는 간결해야 한다. 기획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곳이 아니다. 해야 할 말만 하는 곳이다. 다 쏟아내는 하수구가 아니라, 필터 꽂힌 정수기여야 한다. 뭘 더 추가할지를 고민하는 순간 기획서는 복잡해지고 읽히지 않는 기획서가 된다. 설득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남기는 것이 진정한 고수의 설득 방식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이다.
-생텍쥐베리-
셋째, 시각적이지 않다. 평소 우리 상사의 뇌는 온갖 정보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대부분 텍스트와 숫자인 경우가 많다. 이때 내 기획서조차 텍스트와 숫자로 꽉 차 있다면, 상사의 뇌는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다. 꽉 차 있는 곳에 더 욱여넣을 공간은 없다. 이때 상사의 뇌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샤워시켜 보자. 평소 좌뇌만 쓰는 상사의 우뇌를 시각적인 정보로 공략하는 것이다. 시각적인 정보의 장점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해 보고자 한다.
난생처음 가보는 음식점에 처음 보는 메뉴판이 온통 텍스트와 가격(숫자)으로만 적혀 있다면,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이때 이름 옆에 붙어있는 음식 사진은 나에게 정확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때론 한 장의 그림이 100마디 말보다 나은 경우가 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내 기획서를 시각적인 정보(이미지, 일러스트, 차트 등)으로 무장해 보자.
기획서만 잘 써도 회사 생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물론 개떡같이 지시하고, 피드백도 불분명하게 주는 상사 밑에서 제대로 된 기획서를 쓰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때 무능한 상사 탓만 하고 있는 것보다, 기획서 작성의 핵심을 알고 스스로 개선하는 편이 낫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논리적으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는 것
-전체 흐름이 연결되게 쓰는 것
-간결하게, 쉽게, 시각적으로 쓰는 것
기획서는 '기'를 쓰고 써도 '획'하고 돌아온다고 해서 기획서라고 한다. 그만큼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인 만큼 그 보상은 생각보다 크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설령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A to Z로 내 생각을 정리하고 구조화해봤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기획을 조금 다르게 정의해 본다. 꾀할 기 대신 기회 기 자를 쓰고, 여기에 그릴 획을 더해서 ‘기회를 그리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위에 제시한 4가지 원칙을 내 기획서에 적용해서, 기획서가 획하고 돌아오는 횟수를 줄이고, 제대로 기회를 그리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