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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금희 Aug 18. 2023

눈시울 붉혀지는 워킹맘의 죄책감

맞벌이 부부의 비애

우리 팀은 특성상 12월부터 3월 초까지 굉장히 바쁘다. 이 시기에는 주말에 출근하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 했다. 우리 팀원은 7명이었으나, 선임과 나를 제외한 5명의 직원은 추가근무 자체를 싫어했었다. 추가근무수당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도와달라 말할 수도 없었다. 


요즘 흔히 말하는 MZ사원이었고 일을 주고 나면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선임과 둘이서 매년 야근을 하고 겨우내 잔업을 끝내곤 했다. 출산하기 전까지도 야근을 했는데, 복직해서도 아이 크는 거 보지 못하며 일했다. 나의 선임이 그랬고, 그전 선임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모두가 그러했으니까.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그날도 어김없이 애 엄마 둘이서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둘 다 가정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하려고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일했다. 하지만 그날도 역시 밤 12시가 다 되도록 퇴근하지 못했다. 


선임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응, 왜 전화했어? 엄마 이제 금방 갈 거야~"


- 엄마 언제 와 무섭단 말이야, 또 거짓말했어 오늘 일찍 온다면서..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 딸아이의 우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해, 엄마 진짜 끝났어, 숙제는 다 했어~? 먼저 자고 있어 금방 갈게"


선임의 딸은 초등학교 1학년으로 부모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시기다. 육아휴직이나 워킹맘 퇴사율이 가장 높은 시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선임은 육아휴직도, 퇴사도 하지 못했다. 15년 넘게 일한 선임이 회사에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출산휴가 3개월이 전부였다. 


정확히는 3개월도 채 사용하지 못했다. 당시 회사 문제로 급히 복직 명령이 내려졌고 복직일을 며칠 남기고 조기 복직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육아휴직 사용이 높은 회사다. 국가에서 받는 지원금도 꽤나 많았다. 천 명이 넘는 직원들 중 자녀가 있는 직원들은 굉장히 많았다. 그들 모두 육아휴직과 단축근무를 당연히 거쳐가는 코스처럼 사용하곤 했다. 매 월마다 지원금을 신청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짜증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되는거야? 너무하잖아'


우리 팀에게는 제외된 유일한 혜택이었다. 우리는 팀 구조상 휴직하면 다른 대체자를 정직원으로 뽑아야 했고, 향후 복직할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나의 자리를 포기하고 퇴사하는 게 아닌 이상 주어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를 수긍하고 돈을 벌고자 선택한 것은 결국 나인데 말이다.



통화가 끝난 선임을 바라보며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푹 숙인 선임을 보며 5년 뒤, 혹은 10년 뒤의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끔찍했다. 회사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나아질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참 안일했다. 


조용한 사무실, 옆자리에 앉은 선임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듯 보였다.  


위로를 건네려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내 눈에서 먼저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서로를 달래주면서 감정에 복받쳤고 결국 엉엉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색한 분위기,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임이었다.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어. 그래서 오늘은 꼭 일찍 가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또 못 지켰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남은 일은 내일 하기로 하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서둘러 퇴근을 했다. 그 날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잠들어있는 나의 아이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잠든 아이를 어린이집 선생님께 안겨드렸다. 뒤돌아서 아이 신발을 신발장 아이이름 위에 놓을 때였다. 평소와 같이 1등으로 등원한 아이의 이름 위에 놓인 신발이 보였다.

다른 친구들이 오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오늘따라 홀로 있는 아이 신발이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전날의 여파인지 내 눈에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누가 볼 새라 황급히 어린이집을 나왔다.  


1시간 30분이 걸리는 회사에 출근하려면 아이는 7시 30분까지 등원시켜야 했다. 아이는 유독 아침잠이 많아 무조건 9시까지는 잠을 자곤 했다. 당연히 아침은 한 번도 먹여본 적 없었다. 잠든 아이 옷만 갈아입힌채 안고 어린이집에 데려갔다. 


원에서는 아이를 배려해 오전 9시까지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깨어나면 엄마아빠를 찾으며 한참을 울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날따라 너무 슬펐다.

 

잠이 든 건 분명 집이었는데, 눈을 뜨면 집이 아니니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그날따라 우리를 찾으며 울고 일어날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퇴사밖에 답이 없고,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만하기로 했다.


경제적 여건상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아이에게 조금 더 풍요로운 생활을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거울 수 있는 삶의 무게를 남편과 나눠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곧 체념하는 법을 배울 것이고 적응하면 울지 않을 것이다. 힘든 건 지금 잠시뿐일 거다. 눈 딱감고 참기로 했다. 


하지만 내 아이가 체념이라는 것을 배워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이 고민은 수없이 반복될것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게 죄책감을 안고 적응 중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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