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빛의 과거-은희경

오래되고 가까운 과거의 사람들

by 김밀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이 문장 때문에 이 책은 장바구니를 떠나 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이 문장에 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린 쪽이다. 처음에 떠오른 이름들 외에 다른 이름들도 떠올랐다. 매일매일 집에 가서 놀고 저녁을 함께 먹었던 친구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이 배신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 울면서 음식을 나눠 먹어 본 적이 있었던 친구들 말이다. 그때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 경험의 당사자인 사람은 내 옆에 없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파탄난 관계의 원인 제공자를 찾으려 하고 정확히 잘못의 경계를 나누려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연과 인연이 섞여 유경과 희진이 이렇듯 긴 시간 동안 인연을 유지해 오고 결국 희진이 쓴 소설로 유경은 자신의 기숙사 시절을 반추한다. 어떤 이의 소설에서는 유경과 같은 캐릭터를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라고 묘사했겠지만 은희경의 소설 속에 평범한 사람은 없다. 각자의 서사가 있고 그들의 취향이 있다.


며칠 사이 깨친 사실이지만 공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었다. 정보를 얻지 못하면 뒤처지고 다수에 끼지 못하면 손해를 봤다. 이곳은 숨을 곳이 없는 공동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립은 차별보다 더 눈에 띄었다. (47p)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감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판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86p)


나 또한 기숙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대학 4년 동안 2년은 기숙사 생활을 했고 2년은 자취방을 얻어 생활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집을 떠나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3명이 한 방이었는데 3학년 선배가 싱글 침대, 2학년 선배가 1층, 신입생인 내가 2층이었다. 그 침대의 질서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고 배정받은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정도 눈치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갖춰진다는 것이 놀랍고도 씁쓸했다.

가져온 짐들을 모두 부려봤자 내 공간은 썰렁했다. 천장이 닿을듯한 2층 침대에 올라가 나도 유경처럼 할 것이 없어 일찍 잠을 청했다. 기숙사는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이었다. 적응하는 동안은 수학여행을 와 있는 듯 들뜨고 낯선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막막해서 우울한 시간들이 꽤 길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저 시간에 휩쓸려 지나갔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자기소개를 했다. 누군가가 사주는 밥을 얻어먹고 또 오라는 곳에 참석하고 그곳에 가서 또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2학년이 되어 나도 1층 침대를 쓰게 되었고 고작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사다리를 타지 않기만 해도 얼마나 편한지 깨닫게 되었다. 지나고 보면 왜 그때 나에게 허락된 것들을 더 누리지 못했나 아쉬운 마음이 든다. 기숙사에서 정해 준 규칙보다 나 스스로에게 내가 정해 준 규칙이 더 까다로웠다.

빛의 과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나는 내가 아는 이름들을 대입했다. 오래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이름들에 불이 들어왔다. 지나고 보니 그립지만 그저 그리운 채로 묻어두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덕분에 나는 '빛의 과거'를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재밌게 읽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독서의 경험은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