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밀 Apr 17. 2020

[영화] 결혼 이야기


실소를 터트리게 하는 대사 중에 그런 것이 있다. 

"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

그 말이 우스웠던 건 끝까지 겉멋을 못 뺀 이의 핑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웃던 그 대사가 결혼 후에 공감될 때가 있었다.     

찰리는 연극 감독이고 니콜은 그 극단에 소속된 배우다. 그들은 부부고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다. 그들은 지금 이혼 준비 중이다. 합의하에 성숙하게 이혼을 하자고 생각했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은 니콜이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다른 국면을 맞는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무시무시한 말들을 쏟아낸다. 아들의 양육권 문제와 거주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그들은 과연 잘(?) 이혼할 수 있을까?



올 해로 결혼 8년 차가 됐다. 아직도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면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당연히 혼자 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혼결혼식을 하지 않는 이상 결혼은 혼자 할 수 없는 거니까 나는 당연히 혼자 살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내가 친구들 중 누구보다 빨리 결혼했다. 정신 차려보니 신부 입장을 하고 있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도 그랬다. 뭔가 실수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결혼 1-2년 차였다.       

나는 누구보다 결혼 준비하면서 행복했다. 인생의 미션을 처음 부여받은 사람처럼 귀찮은 것도 없었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사력을 다해 결혼을 준비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결혼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결혼식 자체에 대한 준비는 몇 개월 동안이나 했지만 결혼생활에 대한 준비는 뭘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라는 문제였다. 

     

연애할 때 나는 남편이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점이 좋았다. 그가 '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점이 잘 맞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꿈이 결혼이라는 문을 통과하자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흔들렸고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경제적으로 조금 더 여유 있고 안정적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이해를 하면서도 나는 그게 탐탁지 않았다. 심지어 나 자신도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으면서도 매달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는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는 부모처럼 그의 그런 결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남편도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고 혼란스러워하면서 그야말로 우리는 우왕좌왕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관념적인 단어들을 입에 올리며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나도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싸움들이었다. 남편이 어느 정도 적응했을 때 꼭 이 잔잔한 판을 뒤집고야 말겠다는 듯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아를 찾겠다고 한바탕 난장을 쳤다.     

그때 우리는 ‘누가 더 희생하고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았다면 양보하지 않아도 되고, 희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우린 결혼해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참아야 하는 거지? 결혼이 이런 건지 정말 몰랐어. 결국 나라는 존재가 이 사람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서로의 인생을 움켜쥐고 뻗어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들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놔주자. 그때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라는 말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렇게 잦은 싸움 속에서도 나는 이 사람이 잘 되길 바랐다. 인생을 포기한 듯한 얼굴과 체념한 듯한 표정을 버리고 다시 생기를 되찾길 바랐다.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는 두 사람이 서로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살벌한 말을 하며 끝장을 보는 싸움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초반에 그들이 서로의 장점을 낭독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기념일에, 일상적인 날 속에서 따뜻한 웃음을 터트리던 그들의 모습들.

그 엄청난 여정의 끝,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니콜은 찰리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 준다. 너무 익숙한 솜씨로.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지만 함께 살면 불행했다. 그래서 헤어졌다.       


여전히 나는 내 남편을 잘 모르겠다.(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생활 8년 차의 문턱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결실은 아마 평생을 함께 한다 해도 나는 이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게 당연하다는 점이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제일 괴로웠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실패라고 결론짓기도 했다. 지금까지 나는 남편의 새로운 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떤 날은 감탄했고, 어떤 날은 분노했고, 어떤 날은 지쳤다. 결혼했기에, 부부니까 모두 이해하고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은 버렸다. 내가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담았고 이해 가능한 것까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부부이기에 매일 한 집에서 마주쳐야 하는 존재이기에 더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도 한참은 더 걸어야 하는 결혼생활에 몸살이 날 때마다 아스피린처럼 꺼내 볼 영화가 생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벌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