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경애의 마음-김금희

by 김밀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은 것은 광화문 디 타워 1층에 있는 포비라는 카페였다. 나는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으며 소설을 읽다가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39p, 너무 한낮의 연애)

느닷없는 사랑 고백은 양희가 먼저 했는데 필용은 점점 그 사랑에 빠져 들었다. 나를 아직도 사랑하는지 매일 양희에게 묻다가 별안간 양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심한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사라진 그녀를 찾아 고향까지 가서 사과를 했는데 양희는 그저 나무나 보라고.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으니 나무나 보라고 했다. 주말 오후에 시끄러운 카페 구석에 앉아서도 필용의 마음, 양희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그렇게 울고 말았다. 그 날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을 내내 기대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밖에서 울었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소설을 보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왕산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투썸 플레이스에서였다.


어떤 사랑은 같은 기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되었다. 혹은 어려서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둘 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첫눈을 함께 봤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똑같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낡은 점퍼나 코트를 유심히 보게 됐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추워 보였다는 혹은 더워 보였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땀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었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지하철역까지 느릿느릿 걸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에는 아주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32p, 경애의 마음)


"집을 이 꼴로 해놓고 그런 말이 나오니."
경애 엄마는 뭔가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핀잔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 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 엄마도 안 할게. 엄마도 그냥 누워 있으련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올려놓았던 냄비의 불을 끄자 좁은 집은 조용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까지 다 감아서 말개진 얼굴의 경애가 이윽고 욕실에서 나왔다. (100p, 경애의 마음)

『경애의 마음』에서 내가 울어버리고 만 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엄마가 상처가 깊어 무너져버린 딸을 위로하는 순간. 얼른 일어나! 울긴 왜 울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 엄마도 안 할게. 엄마도 그냥 누워 있으련다. 해주는 순간 말이다. 이 소설 속에서는 이렇게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위로 전문가들처럼 이들은 기대어 엉엉 울어버리고 싶을 만큼 근사한 위로의 말들을 건넨다.

프랑켄슈타인프리징 님께, 우리는 끝장난 연애를 미화하기 위해서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요. 하루에 한 번은 거울을 꼭 보도록 하세요. (92p, 경애의 마음)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172p, 경애의 마음)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내 인생에서 만났던 상수 씨, 경애 씨 같은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그저 시간이 흘러 스스로 털고 일어난 것처럼 생각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군가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일 뿐인데도 언젠가 한 번쯤 만나 상수 팀장님! 경애 씨! 조 선생님 하면서 그들의 손을 잡고 악수 한 뒤, 어색하고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싶다. 그때가 꼭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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