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당 안은 2층까지 꽉 차 있었다. 나는 곧 있으면 무대 위로 올라가야 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라면 질색을 하면서도 나는 그날만큼은 떨리지 않았다. 대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옆에는 같은 동아리 1학년 후배가 서 있었다. 곧 내 이름이 들렸다. 나는 뚜벅뚜벅 무대 위로 올라가 로봇처럼 상을 받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등 뒤로 박수소리가 들렸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2층까지 꽉 찬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기 싫었다.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후배의 이름이 호명됐다. 후배도 상을 받았고. 우리는 나란히 섰다. 교장선생님은 후배가 받은 상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는데 내 귀에는 그저 웅웅 거리는 소리처럼 아득해졌다. 같은 대회에서 후배는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았고, 나는 장려상을 받았다. 후배와 나의 글이 실린 작품집 앞에는 ‘상위권 입상자에게 전국 대학의 문학 특례 입학 특전 혜택’이라고 쓰여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지역 백일장에서 꽤 자주 상을 받았다. 그 이력 탓에 글 쓰는 일에 자주 불려 다녔다. 조회 시간에 나가서 상을 받는 일도 있었다. 반에서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나마 아이들이 내 이름을 아는 건 그 덕분이었다.
고등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 반에 모인 학생들도 각자 사는 동네가 다 달랐다. 학교 전체 학생들도 거의 같은 동네였던 초, 중학교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문예창작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계속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고3이 됐고,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제 문학은 단순히 즐거움의 영역이 될 수 없었다. 고3이기 때문에 독서실이나 학원에 더 깊숙이 처박히는 대신 나는 백일장에 나갔다. 소위 말하는 문학 특기생으로 필요한 상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대상이 필요했다. 여의치 않는다면 우수상도 괜찮았다. 나는 서울의 각 대학 백일장을 도장깨기 하듯 참가했다. 함께 가는 친구와 이 대학은 밥이 맛있다, 저 대학은 교정이 예쁘다 품평이 가능할 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백일장에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얼굴들이 생겼다.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았지만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모 출판사에서 주최한 청소년 백일장은 그 해에 내가 참가한 어떤 백일장보다 규모가 컸고, 상의 권위가 남달랐다. 소설과 시 중에 하나를 골라 한 편을 완성해서 응모를 하고, 작품이 채택된 사람들은 다시 한 장소에 모여 주제를 받고 글을 써야 했다. 내가 보낸 소설이 뽑혀서 백일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을 때만 해도, 나는 드디어 빛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일장을 위해 모인 자리에 동아리 후배가 있었다. 1학년이라고 참여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당연히 이 곳에 올 수 있는데도, 그 순간 묘한 불안감이 싹텄다. 그리고 후배는 당당히 특별 대상인,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받는 날 보다 그냥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런 것뿐이었고 심지어 이번에는 장려상은 받았으니 아주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도 나는 우울했다. 아는 사람이, 그것도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1학년 후배가 상을 받아서였을까? 지금 그 상이 정말 필요한 건 난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수상작을 묶어 한 권의 책이 나왔고. 그 책이 나온 후에는 고작 상위권 입상자가 되지 못해서 느꼈던 아쉬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표지에는 그녀의 이름은 15포인트, 내 이름은 9포인트 정도로 나와 있었다. 한동안 책을 들춰보지도 않다가 어느 날 마음먹고 그녀가 쓴 소설을 읽었다. 그때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나는 후배처럼 쓸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 수도 없었고, 그런 문장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겨우 동네에서 받던 칭찬에 우쭐했던 내가, 백일장에 간다고 수업을 빠질 때마다 묘하게 어깨가 펴지고 당당해졌던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상을 받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하면 글을 쓰는 것은 의미 없습니까?'라고 지금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글을 쓰는 일은 그런 의미였다. 대학을 가는 무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것마저 잘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예전처럼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이름이 우리 반에 있었어?'라는 말을 듣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다. 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그 후배의 소설을 읽은 후 나는 글 쓰는 일을 멈췄다. 스스로도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싹튼 열등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의 성화에 못 이겨 그동안 받았던 작은 상들을 겨우 그러모아 문학 특기생으로 수시 지원했고, 나는 합격했다. 하지만 나는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는 대신 재수를 선택했다. 그때는 다시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책을 읽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재수 후 그전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학과에 지원했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뒤늦게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다. 그런 사춘기를 겪고 나니 다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 글을 볼 사람의 입맛을 상상하며 쓰는 글이 아닌 그저 내가 외로워서, 슬퍼서, 좋아서 쓰기 시작했던 그런 글들을 다시 썼다.
그래서 그 열등감과 재능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벗어났냐고 묻는다면 부끄럽지만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꽤 자주 나는 그 후배의 글을 읽었을 때 느꼈던 박탈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초라한 내 글을 읽어 본다. 예전에는 도저히 내가 쓴 글을 두 번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그리고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받아들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쓰지 않았던 시간보다는 초라하게라도 쓰는 시간이 귀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