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를 사놓는 습관이 있다. 상비약처럼 토마토를 산다. 건강을 챙기는 건 거의 하지 않는데 토마토라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갈아서 주스로 가장 많이 먹고 샌드위치처럼 빵에 넣어먹기도 했지만 대개는 의무감에 사놓은 토마토가 냉장고에서 시들시들해질 때까지 잘 꺼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아는 언니 덕분에 아주 좋은 토마토 활용법을 알게 됐다.
언니는 먼 길을 나오면서 굳이 이걸 들고 나오겠다고 해서 나는 한사코 말렸는데 사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말린 것이다. 언니는 스타벅스 요거트병만큼 밖에 안되니까 일단 먹어보라고. 배를 감싸는 스티로폼까지 두른 채로 언니가 조심히 들고 온 것은 선드라이 토마토였다.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갈라 종이 포일을 깐 오븐 팬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 위에 소금과 바질,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오븐에 2시간 동안 구우면 수분이 바짝 날아가고 토마토가 쪼글쪼글해진다. 그렇게 된 토마토를 올리브 오일에 마늘이나 월계수 잎과 함께 넣어 절여두는 것이다.
언니가 준 선드라이 토마토 절임을 식빵에 올려서 한 입 먹고 바로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이거 진짜 맛있어! 나도 만들어볼래."
토마토는 과연 2시간쯤 지나니 오븐의 강한 열 때문에 쪼글쪼글해졌다. 바질과 올리브 오일의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오븐에 들어갈 때 통통했던 빨간색 토마토들이 목욕탕에 오래 있던 손가락처럼 쪼글쪼글해진 걸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에 남은 서운함, 실망감, 나쁜 말들도 저렇게 오븐에 구워 말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쁜 얘기는 귀에 한번 들어오면 쉽게 나가지 않고 점점 더 불어나 다른 좋은 마음까지 잠식하는가?
엄마는 아마 그냥 한 얘기였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 서운하다고 하는 딸에게 당황해서, 혹은 갑자기 화가 나서.
너라고 뭐 대단하게 부모한테 해 준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서운해해?
너도 뭐 다달이 용돈 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아들이라고 어려워하는 게 아니라 괜히 돈 얘기해서 싸움 만들까 봐 그런 거지.
우는 소리 안 하는 자식, 알아서 잘 지내는 딸이라고 해서 모든 게 괜찮은 건 아니었다.
우는 소리를 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을 뿐. 큰 소리 내지 않고, 알아서 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어째서 몰라주는 걸까? 매번 집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사건 사고를 만드는 자식이 아니라 알아서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자식은 왜 더 만만해지는 걸까?
엄마는 내가 서운하다고 얘기한 포인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이 대하면 될 텐데. 똑같이 대한다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네가 뭘 한 게 있다고?
네가 뭘 그렇게 했어?
네가 한 게 뭔데?
아직까지는 이런 말들은 오직 엄마에게만 들어봤다. 그런데 엄마에게 들어서 그게 가장 아프다. 대단한 걸 하지 못한 건 맞다. 매달 용돈을 드린 것도 아니고, 크루즈 여행을 보내드린 것도 아니고, 명품 가방을 사드린 것도 아니다. 명문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했고, 대기업에 입사하지도 못했다. 엄마가 그렇게 원하는 예쁘고 똑 부러진 딸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대단하지 못해도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평범해지기까지도 쉽지 않았다. 엄마가 하는 저런 말을 들을 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예의, 도리를 지키려고 했던 내 노력과 시간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다. 엄마에게 길게 하고 싶은 메시지를 썼다가 그만 지워버렸다.
다음 날 오후까지도 불쑥불쑥 어제 전화로 들었던 얘기들이 연어처럼 뛰어올랐다. 가장 무거운 화분을 옮겨 분갈이를 하고 온 집안을 청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드라이 토마토를 만들었다.
오븐에 구워진 토마토를 유리병에 담아 올리브 오일을 가득 부었다. 이 올리브 오일 속에서 토마토는 얼마나 풍부하고 맛있는 맛을 낼 것인가? 지금 내 마음에 있는 나쁜 말들, 서운한 마음, 실망스러운 마음도 언젠가는 푹 저려져서 뭔가 쓸만한 것으로 나온다면 좋겠다. 그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재료가 된다면 가장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