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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Jun 18. 2020

늘 일기에 등장하는 그 동네

1년이 모자란 20년 만이다. 이것도 친구가 이 동네로 이사하지 않았다면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가려면 왜 못 가겠냐만은 쉽게 마음을 먹기 어려웠다. 친구의 이사는 좋은 이유였다.

신촌역에서 2호선을 타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 내렸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는 곳은 이상하게 형광등이 모두 켜 있어도 어둡다. 3년 내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아니, 동대문운동장이었던 곳에서 나는 5호선을 갈아타고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매일매일 다니던 길이었는데도 자꾸 마음이 들떴다. 이사한 친구에게 주려고 셀럼 화분을 하나 들고 떨리는 손을 거의 셀럼에 의지하면서 쌍문역에서 내렸다. 쌍문역 2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갈아탔다. 응답하라의 배경이 된 곳답게 쌍문역을 이렇게 오랜만에 왔는데도 많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버스는 익숙한 듯 낯선 정류장들을 지나 내가 9살부터 18살까지 살았던 동네로 들어갔다.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것도 아닌데도 그 동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바깥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서울 치고는 좁은 도로도 여전했지만 무엇보다 2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장과 시장 앞에 있는 화장품 가게, 시장 가는 길에 있던 약국, 코너에 있던 슈퍼, 무엇보다 새로 지어진 대리석 마감재 빌라들을 지나 맨 끝에 위치 한 빨간 벽돌의 내가 살던  빌라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빌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희망이기도 절망이기도 했던 그 공간이 이제는 완전히 낡아버린 모습으로, 그대로 우뚝 버티고 있었다. 그 빌라 바로 앞에는 아버지가 하던 세탁소가 있었다. 그 세탁소가 이렇게 작은 곳일 줄은 몰랐다. 세탁소 앞에 있는  붉은 벽돌의 빌라로 옮기기 전까지 우리는 그 세탁소에 딸린 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었다. 9살이라 어렸다고 해도 뭔가 상황이 나빠졌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삼 남매는 장롱이 들어가서 다리를 채 펼 수 없는 방에서 각자 편한 자세를 찾기 시작했다. 


세탁소 바로 옆에는 노점처럼 운영하는 야채, 과일가게가 있었고 그 바로 옆이 슈퍼마켓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슈퍼마켓은 얼마나 커 보였는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었고 먹고 싶은 과자와 음료수가 얼마나 가득했는지 생각난다.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 청과상이 없어진 자리까지 그대로 쓰고 있는 슈퍼도 정말 작은 동네 슈퍼였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와서 가게 앞에서 먹기 시작했다. 여기에 살던 이후로 10cm, 20cm 큰 것도 아니고 내 키도 이 곳에서 자란 게 전부인데 왜 모든 가게는 너무 크고 길은 전부 멀게 느껴졌을까? 

늘 버스에서 내리면 집까지 걸어가면서 중간에 쉬다 가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신기하게도 버스 정류장부터 집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눈물이라도 나지 않을까? 마음이 자꾸 울렁거려서 버스 안에서는 혼났는데 오히려 동네에 도착하니 드라마 세트장이라도 돌아다니듯 구석구석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살았던 빌라 1동 206호, 내 기억 속에 분명히 내 방 창문을 어른거리던 자줏빛 목련나무가 있었는데 빌라 입구는 내 키보다 낮은 작은 나무뿐이었다. 다른 빌라 입구에는 아직도 나무들이 그대로 있던데 왜 우리 집 앞 목련만 없어졌을까? 그 나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약간 언덕에 자리 잡은 그 빌라 앞에서 몸을 돌려 빌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대로 보였다. 그 길을 매일 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 다녔을 아이도 떠올랐다. 그 아이의 느린 걸음걸이 탓에 늘 엄마는 화가 났다. 
"궁상맞게 그러고 다니지 말고 어깨 펴고 좀 씩씩하게 걸어 다녀! 고개를 왜 그렇게 맨날 푹 숙이고 다녀!" 
어리광보다는 불안을 먼저 배워서 사람들 눈치를 보고 어떻게 하면 큰소리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하게 염려하던 아이가 있었다.      


친구를 만나 얘기했다. 


"만약에 그때 나를 만나게 된다면 네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여기던 일도 결국 끝난다고, 나중 되면 다 괜찮아지고 편안해진다고 얘기해주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많이 웃어도 된다고."

친구는 아마 그때 그런 얘길 들었어도 웃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그런 나이라고. 또 사춘기지 않았겠느냐고. 정확히 말하면 사춘기는 나쁜 상황은 이제 다 끝났다고 안심했을 때 찾아왔다. 그때는 그저 일찍 철이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 아이의 귀에 내가 해주는 말이 들리지 않았을 거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인간은 원래 자기가 빠진 슬픔이 가장 큰 법이니까.      


그 동네에 사는 동안 나는 ‘올 해가 내 인생에서 최악의 해다’라는 일기를 쓰곤 했다. 고작 10년 남짓 산 어린아이가 최악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한 일들이 그 동네에서는 자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나는 자주 그 동네와 그 집에서 있던 나를 떠올렸고,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그 동네에서의 나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슬프지 않았다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그 동네는 여전히 모든 집과 건물들이 나를 덮칠 만큼 크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처럼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제 이 동네가 작게 느껴질 만큼 내가 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어떤 것보다 내게 안도감을 줬다. 이 동네를 벗어나서 지금 나는 행복해! 가 아니라 이 동네에 다시 돌아와 이 동네를 둘러보는 내가 좋았다. 이 동네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서 좋았다. 


친구 덕에 아마 20년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이 동네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친구는 지금 임신 중이고 몇 달 후면 친구의 아이는 내가 살았던 이 동네에서 살게 된다. 여러모로 신기한 인연이다. 친구의 아이를 보러 자주 가야지. 그 아이가 건강하게, 누구보다 웃음이 많은 아이로 그 동네를 힘껏 뛰어다니길 진심을 다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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