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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Jun 15. 2020

고마워. 나의 오렌지 나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였고 나는 큰집으로 놀러 갔었다. 남동생들과 남자 사촌은 게임기를 두드리며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놀이에 잘 끼지 못했다.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문방구에 들어갔고 몇 권 없던 책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노란색 표지에 커다란 라임 오렌지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아주 작은 제제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나는 용돈을 털어 그 책을 샀다. 

그 책을 생각하면 그래서 한여름이 떠오르고 큰집 아파트의 작은 방이 떠오른다. 그 방에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그 책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제제는 벨트로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를 이해하는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제제는 아이였기에 사랑을 원했고 그 사랑을 주는 사람이 기적처럼 나타났다. 뽀르뚜가. 그저 라임 오렌지 나무와 말을 하는 상상으로 충분히 만족하던 제제에게 실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제제에게 맛있는 과자를 사주고 피크닉을 데려가 주는 사람. 제제는 처음으로 사랑을 받는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 하지만 세상은 가차 없이 이 아이의 아주 작은 희망을 빼앗아 버렸다. 뽀루뚜가는 그렇게 제제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나는 책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제제나 나나 이해해 줄 사람이 마땅히 없는 처지는 비슷했다. 



내 인생에 뽀르뚜가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 제제에게 있던 라임 오렌지 나무가 나에게도 있다면 좋을 텐데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살지 못했고 우리 집에 있는 나무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어릴 때는 그런 나무를 갖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른이 되어 나는 우리 집에 오렌지 나무를 들일 수 있었다. 

물론 제제의 집 마당에 심어져 있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아니지만, (나무라고 이름은 붙어있지만 그저 화분에 심어져 있는 얇은 묘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특별했다. 그 어떤 화분을 집에 들였을 때 보다 흥분했다. 


오렌지 나무는 집에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하얀색 꽃망울을 잔뜩 매달았다. 화분 옆에 앉으면 오렌지 향기가 퍼졌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하얀색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이 너무 예뻤다. 아주 작고 귀여운 하얀색의 꽃이었다. 하지만 꽃은 생각보다 빨리 시들었다.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렇게 초록색 잎을 매달고 있던 가지에서 잎 끝이 조금씩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몰라서 햇빛이 더 잘 들어오는 자리로 옮겨도 보고, 햇빛을 싫어하나 싶어서 햇빛이 닿지 않는 자리로 옮겨보기도 했다. 물을 자꾸 줬다. 그런데 내가 쏟는 애정을 밀어내기라도 하듯 아침에 거실로 나가면 우수수 초록색 잎마저 떨어져 있었다. 제제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잘리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의 오렌지 나무는 말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물이 너무 많아서 뿌리가 썩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살살 화분의 흙을 걷어냈다. 역시 화분 안에는 빠지지 않은 물이 가득 고여서 흙이 완전히 잠겨 있었다. 뿌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완전히 젖어버린 흙을 걷어내고 포슬포슬한 흙과 마사토를 섞어 다시 분갈이를 해줬다. 미안해. 미안해. 그래도 알아채서 다행이다. 


분갈이를 한 화분을 햇빛이 잘 드는 창문 쪽으로 옮겨 주었다. 이미 잎이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만 지났을 뿐인데도 확실히 조금씩 달라졌다. 자고 일어나니 아주 작은 속눈썹 같은 새싹이 가지에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살아나는구나!!

그다음부터는 다른 가지에서도 잎이 삐져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잎이 점점 커졌다.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잎들이 자라고 점점 모양을 갖춰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하얀 꽃망울이 다시 한번 매달렸다. 꽃이 다시 폈다. 


언젠가 이 오렌지 나무에 과일이 매달릴 수 있을까? 죽을 뻔한 나무를 살려놓고 이제는 과일까지 달리지 않을까 기대하다니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 제제였다면 그저 다시 잎이 달리고 꽃이 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했을 텐데. 

어린 시절 내 추억 속에 있던 단 하나의 나무, 그저 제제라는 아이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내 옆에 있어 준 것처럼 위로를 받았던 그 나무. 새삼스럽게도 이 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뽀르뚜가같은 어른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코 아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자신의 불행과 우울에 빠져 허덕이느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제제의 아버지를 더 닮아버린 것 같다. 
과연 나는 맨발로 자기 부모를 피해 뛰쳐나온 소녀를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인가? 주변에서 자신의 아이를 함부로 다루는 이를 볼 때 행여 나에게 불똥이 튈세라 피한 적은 없는가?  
자기반성을 아무리 해도 어른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생각은 해야지. 오렌지 나무 앞에서 나는 내가 어떤 어른 이어야 할까? 고민해 본다. 

부담스러운 애정도 서운한 무관심도 아닌 적당한 사랑을 찾아서 오래오래 이 오렌지 나무를 우리 집에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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