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by 김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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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함, 의무감, 죄책감이 버무려진 독서를 한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어도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 집에 쌓인 책이 있어도 책을 또 산다. 집에는 점점 책이 쌓여가는데 심지어 도서관도 간다. 도서관에 가서 또 책을 빌려 온다. 책을 읽는 일 보다 책을 고르는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 오프라인 서점에서 골라 온 책,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 내가 움직이는 자리마다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나는 심각한 고민이 빠졌다.

읽었던 책의 내용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몇 해 전 나는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에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래서 주변 지인들에게 이 책을 정말 많이 추천했다. 내 일기와 SNS에도 이 책에 대한 흔적을 남겼다.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만 남아 있다. 내가 그 책을 정말 좋아했던 기억, 사람들에게 추천했던 기억만 남아 있고, 그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문장이 너무 마음 아팠던 것 같은데, 그 장면에서 눈물을 쏟았던 것 같은데, 최근 그 책을 읽은 이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생경할 수 없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당장 어제 읽은 책의 내용도 단박에 기억나지 않는데 이 습관적 독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는 뭐하러 책을 읽어야 하나? 그저 불안해서 책을 읽는 걸까? 아니면 난독증에라도 걸린 걸까?

불안감을 채 해소하기도 전에 예약주문으로 구매한 김연수 작가의 신작 소설이 도착했다. 책을 받고 이토록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나는 김연수 작가를 정말 좋아했다. 오래전 나는 그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어딜 가든 김연수 작가를 좋아한다고 수줍게 고백했고, 신작이 나오면 작가와의 대화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연예인에게도 보인 적 없는 팬심을 처음으로 발휘했었다. 그런데 내 책상 가득 그의 책이 꽂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모든 프로필과 블로그를 점령했던 아름다운 문장들이, 한 페이지를 몇 번이나 읽었던 그 장면들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것은 또 그의 소설을 매우 좋아했던 내 모습뿐이다. 그러니 의무감에 책을 주문해놓고 막상 책이 집으로 도착하니 마냥 기쁘진 않았다. 몇 년만의 신작이고 분명 나는 그의 소설을 기다렸는데 말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의 모자란 기억력이 너무 빨리 글을 읽어 내려가는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어 밥알이 뭉개져 단맛이 미어지도록 씹는 것처럼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더군다나 이것은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백석은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니, 그의 말을 읽을 때는 더 천천히 문장을 곱씹었다.

백석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고, 그를 안다면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한 번쯤은 읽어봤을 것이다. 나도 그의 시를 교과서와 문제집을 통해 접했다. 그래서 나는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것들의 의미를 찾는 방식으로 그 시를 만났다. 시 읽기의 가장 부적절한 상황에서도 그 시가 너무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그 시대를 전혀 체감할 수 없는 나에게,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의미가 무엇이든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그 풍경 속에 들어가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것에 충분히 마음이 움직였으니.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시인 백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평균 이하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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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북에서 당의 이념에 맞는 시를 써내라는 요구에 고뇌하는 기행(백석)이 등장한다. 그는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어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려고 하지만 당은 그의 사상을 검증한다는 명목 하에 시 쓰기를 강요한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2개의 장면은 이렇다.


기행은 자신의 고향인 정주가 아닌 생판 낯선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파견지가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처분을 받으며,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34p) 기행은 자신의 파견지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것은 곧 묵살된다. 그렇게 체념한 상태로 자신의 파견 지를 찾아가다 역 대합실에서 서희라는 교원을 만난다. 자신을 반갑게 알은체를 하는 그녀가 의아해 자신을 아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196p)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썼으니 당신은 삼수에 오신 것 아니냐고 신뢰에 가득 찬 눈빛으로 묻는 그녀 앞에서 그는 결국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고 자리를 피하고 만다. 시인 백석이 아니냐고 재차 묻는 그녀에게 그는 '아니오, 아니오. 나는 그런 사림이 못 됩니다.'(198p)라고 대답한다. 그날 밤도 시에서와 같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번째 좋았던 장면은 러시아 시인 벨라와 기행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폭격기가 육백 대나 날아와 포탄을 쏟아부었을 때, 스탈린그라드는 영원히 불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밤은 낮처럼, 낮은 밤처럼, 물은 불처럼, 불은 물처럼. 악은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됐죠. 그게 바로 전쟁, 지옥의 풍경이에요. 그렇게 몇 달 뒤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이 꺼졌을 때,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됐죠. 그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 안에서 조선의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4-165p)


그녀의 말처럼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이라면 기행은 매일매일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쯤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그저 쓸쓸하다는 빈약한 감상을 남겨도 될까, 그런 마음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이든 읽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얼마든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슴없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자유가 허락된 세상에서 나는 투정을 부리고 있으니 또 한 번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이 글에 대해 이만큼의 글을 썼다는 사실만 남고 아무것도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분명히 내 마음에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때는 다시 한번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읽을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재차 읽고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문장을 내 마음에 새기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