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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Aug 25. 2020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8월 3일 첫 출근을 했으니 오늘로 4주째다. 한 달. 5개월 계약기간 중 한 달이라는 시간이 벌써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계약을 하면서도 5개월은 금방 가겠군. 했는데 예상만큼 빠른 시간이기도 하고 눈물이 날만큼 더딘 시간이기도 하다. 

업무 특성상 자세히 업무를 소개할 수는 없으나 출근하고 교육을 받고 보니 생각보다 일이 단순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인 데다 5개월 한정된 기간 안에 해야 하는 일이니 거의 부담이 없이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말 그대로 단순 업무, 반복되는 작업인데 양이 많으니 아르바이트생을 대거 뽑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교육해주시는 분이 아마 이 일은 어디 가서도 아르바이트로 해보긴 힘드실 거예요.라고 하더니 정말 하면 할수록 이런 일을 아르바이트가 해도 될까? 의심이 든다.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기도 하지만 책임이 따르기도 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는 썼고 교육은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와서 저 생각보다 일이 너무 심각한데요. 그만두겠습니다. 하진 못하겠다. 일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게 교육이 2주 진행됐고 일주일간 실제 업무처럼 가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매일 내가 처리한 리스트에 대한 QC가 진행된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몇 개가 틀렸고, 왜 틀렸는지 상세한 리뷰가 도착한다. 

이곳이 회사, 그것도 매우 큰 회사라는 것을 증명하듯 엑셀 파일의 현란한 수식과 그래프로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함께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수치로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 파일은 모든 아르바이트생에게 공유된다. 그러니 내 실력은 전체 공개인 셈이다. 

그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할 틈이 없을 만큼 일은 빡빡하게 진행된다. 실수가 0에 도달하는 것이 최종 목표고 그 목표에 아르바이트생들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점점 압박이 시작된다. 




나는 일을 잘하는 편일까? 못 하는 편일까?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너무 오래라 그것을 잊고 지냈는데 나는 일을 빨리 배우는 편이 아니다.(이건 면접 때 거짓말 했다. 여러 일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일을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라고.) 일을 배우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오래 매일매일 그 일을 하면 잘하게 된다. 간혹 매일매일 해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달, 몇 년 시간을 투자하면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된다. 나는 꽤 오래 다닌 직장이 많았다. 그러니 대개 퇴사할 때쯤이면 일을 잘하는 축에 속했고, 교육을 하는 입장도 됐다. 그러니 그 몇 년 전 내가 처음에 얼마나 버벅대고, 시행착오가 많았는지는 까맣게 잊고 퇴사하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 일을 시작한 지금,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없는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더 조급하고, 서두르다 일을 망치고 있다. 매일매일 아침에 배달되는 QC 파일 속 그래프는 나를 점점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 


'이걸 왜 못 봤지?'

'아니? 어디에 이런 게 쓰여 있었어?'

봐도 봐도 안 보이는 오점들. 두 번 세 번 검수를 해도 눈에 안 띄는 것들이 있다. 

"더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오늘은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단체 메신저 속에서 오늘도 나는 공수표를 남발한다. 

어제는 졸았던 것이 아니다. 엊그제는 대충대충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늘 눈에 불을 켜고 있고, 최대한 엉덩이를 떼지 않고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이면 실수한 것이 생긴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감이 떨어진다. 


설상가상 집까지 거리도 멀어서 1시간 반, 버스를 놓치면 2시간은 걸린다. 깜깜한 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교 위를 무심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 삶 전반을 돌아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거지?'




열몇 명의 아르바이트생 중 나처럼 이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그래 봤자 아르바이튼데! 하면서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개의치 않음이 부럽다. 실수를 하지 않아서 실업무에 투입된 사람보다 부러운 것은 어떤 압박 속에서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 기분이 나쁘지 않고, 기분이 상하지 않고, '하라고 하면 하면 되죠. 못하면 어쩔 수 없고요.'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 나는 일하면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나는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 (그 소리를 듣고 좋을 사람은 없겠지만)

밥값을 하는 사람이고 싶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완전히 처음 접해 본 업무를 겨우 3주 했는데 못하는 게 당연하지,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하지. 그걸 강요하는 사람들이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매일 항변해보지만 혼자 있을 땐 결국 내가 무능력한 사람인 건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이깟 일 좀 못하면 어때? 가 아니라 이런 일도 못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우울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제가 일을 빨리 배워야 되는데 죄송해요."

나는 오늘 나의 교육 및 QC를 진행해주시는 분께 사과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저 "아니에요. 처음에는 다 그렇죠. 뭐." 라거나 "그러게요. 빨리 익숙해지셔야 서로 다 편해질 텐데요."라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저한테 전혀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저도 월급 받고 하는 일인데요."


오?

그러고 보니 아주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내가 빨리 업무를 익히지 못한다고 해서 회사가 이 직원의 월급을 그만큼 차감해간다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직원도 월급을 받고 그에게 할당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회사라는 곳이 그런 곳 아닌가? 모두 돈을 받고 맡겨진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그렇게 미안해하고, 주눅이 들었단 말인가? 나 하나로 인해서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 순간 직원의 단순한 그 말이 살짝 마음을 가볍게 해 줬다. (맥락상 공짜로 하는 일도 아니니 미안해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저렇게만 적고 보니 비꼬는 말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얼른 돈 받는 만큼 일은 해내야 할 텐데.라는 걱정도 들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돈 받는 만큼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직 4개월 하고 4일이 남았다. 

결국 익숙해지긴 할 것이다. 일은 결국 끝까지 남는 사람이 잘하게 된다. 그 믿음은 아직 나에게 있다. 그러니 나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에 빠지지 말 것.  그것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내가 처리한 일에 대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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