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집까지 오는데 버스로 30-40분 정도 걸렸다. 버스에 탈 때는 좌석이 많이 비어있어서 앉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쯤 왔을 때 하교시간과 맞았는지 중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버스에 가득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정거장을 더 달려 우리 집 앞에 내렸다. 집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뭔가 느낌이 싸했다.
나는 생리 중이었는데 입고 나갔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뒤쪽에 피가 너무나 선명하게 배어있었다. 지나치면 못 볼 정도의 크기도 아니고 동그랗게 두 군데가 물들어있었다. 버스 좌석에 앉아있는 동안 깔고 앉았던 그 위치겠지. 청바지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티셔츠를 지나 어떻게 트렌치코트에까지 피가 묻었을까? 옷을 다 벗어버리니 응급상황이라도 닥친 현장처럼 온통 옷마다 피투성이다.
얼른 샤워를 하려고 뜨거운 물줄기 속에 서 있으니 부끄러움과 분노, 민망함과 후회, 걱정과 불안 등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중얼중얼 나도 모르게 말을 되뇌었다. 다리를 구르며 화도 냈다.
누가 봤을까? 하필이면 중학생 애들이 한가득 타고 있을 때!
혹시 사진 찍은 사람은 없겠지?
검은색 옷을 입고 나갈걸. 하필 밝은 베이지색 옷을 입고 나가서!
아니야! 다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던데 못 봤을 거야. 다시 볼 애들도 아니고. 잊어버리자!
하지만 마음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고 나는 자꾸만 버스에서 내려서 피가 묻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떠올렸다.
중학교 1학년 때였을까? 매주 월요일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김없이 아침에 운동장 조회가 있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두 나와 줄을 맞춰 서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얘길 듣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어떤 남자애들이 낄낄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옆을 쳐다봤는데 우리 반의 한 여자아이가 코를 흘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코를 흘리며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아이는 또래에 비해 키는 컸지만 말이 굼뜨고 서툰 편이었다. 여지없이 그 아이는 무리에서 제외되었고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둥, 할머니랑 둘이 산다는 둥 그 아이에 대한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의 회색 교복 치마 뒤편이 살짝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콧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당황스러움이었다. 정작 그 아이는 자신의 치마가 그렇게 된 줄은 모르는 듯했다.
그때 나는 그 아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을까? 누군가 그 아이를 양호실에 데려가던가, 체육복으로 갈아입게 해 줬을까?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고 그저 학교 정문 앞에서 그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를 데려가던 모습만 기억난다.
그때 나에게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충격적이었을까? 그것이 피라는 자극적인 색깔과 의미의 그것이기도 하지만, 그건 아마도 내가 한 반에 모인 아이들 속에서 아슬아슬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그 아이처럼 놀림감이 되고 무리에서 제외되고 누구도 함께 앉기 싫어서 내내 옆 자리가 비어있고, 억지로 선생님이 짝을 시키면 욕설을 내뱉는 상황에 처하는 게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피 묻은 치마는 나에게 어떤 상징 같은 것이었고,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학교는 위험한 곳이다. 그런 일이 한번 있으면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아이는 1년 내내 혼자였다.
그때 이후로 20년도 더 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고도 나는 피 묻은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는 사실에 수치스러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고, 어린 시절 느꼈던 불안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다. 아직도, 여전히 그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썸네일만 본 것이지만 어떤 유튜브 채널에서 그런 실험을 했던 것 같다. 어떤 여학생이 생리가 묻은 옷을 입고 서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에 지금의 내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의 치마가 그렇게 물들어있는 것을 봤다면,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 여학생에게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근처 건물 화장실에 데려다주거나, 편의점에서 생리대나 물티슈를 사다 줬을지도 모른다. 이건 수치스러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한 달에 한번 생리를 하는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 여자아이를 위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나라고 한다면,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타인이 아닌 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오늘 경험했다. 나는 전혀 의연하지 못했다. 정작 그 어린 친구에게 해주려고 했던 얘기들을 나에게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 그렇게 칠칠치 못해!
미리미리 조심했어야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생각할수록 무섭다. 소름 끼치도록 위선적이다. 성숙하고 따뜻한 어른이 된 양 연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해왔나?
같은 반의 그 아이를 1년 내내 불안한 시선으로 보면서 나는 제발 더 이상 저 아이에게 눈에 띄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아이들의 시선이 주목되고 놀림감이 될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그 아이를 양호실에 데려다주지도 않고, 갈아입을 체육복 바지도 내밀지 못하면서 나는 그런 한심한 마음만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이 후로 어째서 이토록 성장하지 못했나.
들어오자마자 화가 나서 세탁기에 처박고 돌린 옷들은 언제 피가 묻었는지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다. 그저 58분 세탁만 하면 없어질 핏자국일 뿐, 이것은 낙인이 아니다. 코피를 흘리다 옷을 버린 사람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타박하지 않듯이 나는 나에게, 과거의 그 아이에게, 내 인생에 앞으로 만나게 될 수도 있는 어떤 이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