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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Nov 15. 2015

정갈한 운동화

Adidas x hyke

 10월에서 11월로 달력이 한 장 넘어갈 때 어울리는 소리를 골라야 한다면, 경쾌한 실로폰 소리가 어떨까 싶습니다. 우리가 일요일 낮에 목욕탕에 앉아서 가끔 듣던 그 소리요. 딩동댕동!


 그 실로폰 소리는 전국불행자랑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11월이 오자마자 정말 주변의 모든 친구가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가 처한 불행을 늘어놔요. 저는 그 얘기를 묵묵히 들어줍니다. 이미 너덜너덜 걸레 짝이 되어버린 저의 불쌍한 영혼은 반대편에 앉은 과묵한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하더라도 동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쭉 들어봤는데, 오늘은 네가 우승하고, 음, 넌 지역 예심부터 다시 해야겠는데.  


 여기까지 읽는 동안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을 테고, 누군가는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생겼을 겁니다.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생기신 분들께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기업 공채 시즌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계시는군요. 그거 되게 좋은 거예요.


 제가 나름대로 터득한 파괴된 영혼 조각을 다시 붙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처럼 쓰고 싶은 글자를 의식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타이핑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깨끗하고 정갈한 운동화를 보는 일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멸종해버린 21세기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가을에 신는 정갈한 운동화일 겁니다. 길거리에서 멋진 테니스화를 신고도 얼마든지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라파엘 나달은 굳이 코트 위에서 엉덩이 사이에 낀 운동복 바지를 빼는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텐데.


 멋진 신발은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미신을 아시죠? 면접장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실용적인 잣대는 영혼을 치유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왠지 보고 있으면 좋은 예감이 생기지 않나요?


 손에 잡히는 것은 죄다 허망한 형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무튼, 전 그렇습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그렇게 사는 거죠. 알잖아요. 우리.



Adidas x hyke - Haillet Shoes, Superstar Shoes
http://www.adidas.co.uk/hyke-haillet-shoes/B261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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