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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Nov 17. 2015

적확한 글

김훈 '라면을 끓이며'

  인간 김훈을 지지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김훈의 글을 수긍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최소한의 문장성분으로 구축된 그의 글은 숨을 조인다. 숫자가 아닌 문장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문장 속 수사는 너무 적확해서 정확하다는 느낌을 준다. 속도감 있는 특유의 단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의심이 들지 않는다.


  김훈은 기자였다. 2002년 한겨레 신문 재직 당시 ‘거리의 칼럼’이라는 제목의 코너를 연재했다. 총 31편의 칼럼은 모두 원고지 3매 분량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엔 애매한 분량이다. 김훈은 그 분량 안에다 간결한 문장으로 팩트만을 나열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주장보다 강한 힘을 발휘했다.


  지난 주말, 일본에 지진이 나고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동안에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시위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과잉과 관용을 놓고 또 싸운다. 그것이 이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진창을 벌이는 동안, 김훈이 2002년에 쓴 칼럼을 읽었다. 제목은 <'밥'에 대한 단상>이다.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9월 말 출간된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 있습니다.

특이하게 표제작이 첫 번째 글이에요. 사유의 깊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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