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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Nov 26. 2015

처음이니까

wwweekendin blanket set

저는 모텔의 특실, 할증이 붙은 택시비, 어쩌면 식어버렸을지도 모를 그녀의 마음 따위를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대와 신촌 사이 모텔촌 초입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애와 처음 섹스하리라 마음먹은 밤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처음이니까 모텔은 싫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나 싶었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한동안 우리의 연애사를 반추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러려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는데, 무심코 집어 든 오늘의 속옷이 그녀를 이렇게 가혹하게 만드는 건지 남자를 밀어내는 멘트로 꽤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라한 통장 잔액과 주말의 모텔 숙박 비용과 무계획적인 소비 행태와 카드 단말기를 긁는 카드의 날렵한 감각이 제 온몸을 스치며, 물욕이 제 삶을 파괴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예쁜 그녀 대신에 미천한 몸뚱이를 감싸는 바지와 셔츠를 택한 꼴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한동안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자취방을 떠올렸습니다. 꽃무늬 벽지, 노란색 장판, 체리 색 몰딩, 내가 사는 공간의 비루함을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사랑은 생각보다 가볍고 짧고 속이 좁으니까요.  

그러니까 방바닥에 떨어져 있을 짧고 구불구불한 터럭들보다 더 신경 쓰이고 끝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로 이불입니다.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같이 잠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함께 누워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그 이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함께 싣고 경부선을 따라 서울 땅에 당도한 그 야릇한 빛깔의 이불 대신에 따뜻하고 가볍고 깔끔한 베이식 톤의 이불이 있었다면 조금 더 쿨해질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시험에 드는 그녀가 미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럴 필요 있나 싶었습니다. 처음이니까 저도 모텔의 특실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반도의 ‘이브자리’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닌데, 큐브 생활자의 공간에 그만한 이불은 사실 없는데, 하지만 저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삶을 꾸려나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공과금을 내고 스스로 자질구레한 생필품들을 방 구석구석 채워넣으니까.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공간을 갖춘, 나는 이제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개뿔.

결국,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은 그녀의 무장 해제를 도와줄 푹신푹신 편안한 비싼 이불을 직접 사는 것.

역시, 물건은 힘이 세고 돈은 전지전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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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ekendin
double cotton basic blanket set.
178,000원

http://www.29cm.co.kr/shop/shop_detail.asp?idx=7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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